모든 슬픔은 당신이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것들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다면, 견뎌질 수 있다.
-이자크 디네센-
<미래의 피해자들은 이겼다> 김승섭, 난다, p.259
올해 여름도 어김없이 능소화가 피었다. 할머니는 담장의 능소화를 가리키며 만지면 눈이 머는 꽃이라 하셨다. 예쁘다고 소꿉놀이하다가 꺾을까 봐 그러셨을까. 저런 발랄한 주황빛 뒤에 눈을 멀게 만드는 독을 숨겼다니 앙큼한 꽃 같으니.. 그 어린 날 이후로 능소화의 주황은 내숭 떠는 밉상의 색깔이 되었다.
며칠 장대비에 동네 능소화 꽃잎이 바닥에 짓이겨진 채 널브러졌다. 저 아이는 끝내 밉상이라 이렇게 이쁘게 피었으니 동네 사람들 구경 오라 말도 않고 저리도 혼자 져버렸네 첫새벽에 혼자 중얼거리며 골목 모퉁이를 돌았다. 아뿔싸. 할머니가 살던 그 집, 그 방, 그 창문이다.
그리도 오래 함께 살았으나 정작 가실 때는 말 한마디 손 한번 잡아드리지 못했다. 날 붙잡고 “아이고 내 아들아.” 하고 우시던 그 무렵의 당신은 버거운 내 마음의 짐이었다. 이제는 누구와도 당신의 이야기를 나누지 못해 기억 저편으로 물러나 있다가도 능소화 꽃망울 터질 무렵이면 그 기억도 꽃과 함께 터져 나와 미처 문장이 되지 못하는 말들로 머릿속을 떠다닌다. 그날의 슬픔과 그간의 애증, 유년의 추억을 한데 뭉뚱그려 문장으로 박제해본다. 능소화를 바라보던 그 마음에 이젠 그만 마침표를 찍고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