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th
오늘 할머니 생신이어서 미역국을 끓였다.
끓이다가 문득 생각했다. 내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엄마가 있기 때문이고, 엄마는 또 할머니 때문이고… 그렇게 세대를 따라 쭉쭉 올라가다 보니, 어느새 ‘세대’에 대한 생각이 ‘시간’에 대한 사유로 흘러갔다.
[순전한 기독교-C.S 루이스]라는 책이 있다. 기독교의 대표적인 변증서로 불린다. 다음은 그 책에 실린 한 챕터의 내용이다.
앞 장에서 나는 기도라는 주제에 대해 거론했다. 우리의 마음에 그것이 아직 생생하게 남아 있는 동안에 기도라는 전체적인 사상에 대해 발견되는 어려움을 다루려 한다.
어떤 사람은 "나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이 같은 순간에 자기에게 기도하는 모든 사람의 기도를 경청하신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느끼는 것을 발견했다.
첫 번째로 유의해야 할 것은 문제는 "동일한 순간에"라는 말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 사람이 한 사람씩 차례로 하나님께 나아오며, 하나님이 그 일을 완수할 무한한 시간이 있는 한 하나님이 아무리 많은 사람의 기도라도 경청하신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 문제의 배후에 있는 것은 하나님이 한순간에 해결하기에는 너무 많은 일을 가지고 계신다는 생각이다. 물론 그것은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일이다. 인생은 순간순간 우리에게 다가온다. 한순간은 다음 순간이 다가오기 전에 사라지며 각 순간 사이에는 공백이 없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시간의 흐름 현재, 과거, 미래라는 배열은 우리에게 인생이 다가오는 길 뿐만 아니라 만물이 존재하는 길이라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우리는 우주와 하나님 자신이 우리처럼 과거에서 미래로 움직인다고 추정한다.
그러나 많은 지식인은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처음으로 유한 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사상을 제기한 사람들은 신학자들이었고, 그 후 철학자들도 같은 주장을 했다. 그리고 지금은 몇몇 과학자들도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하나님은 유한 안에 거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의 생명은 계속 이어지는 순간들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늘 밤 10시에 100만 명이 하나님께 기도한다 해도, 하나님을 10시라고 부르는 하나의 작은 순간에 그들 모두에게 귀를 기울이실 필요가 없다. 태초 이래 모든 순간이 하나님에게는 항상 현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영원을 소유하고 계심으로, 비행기가 불길에 쌓여 추락할 때 조종사가 순간적으로 드리는 기도도 들으실 수 있다. 이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주제이다. 비슷한 예를 들어 설명해 보기로 하자.
내가 소설을 쓰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메리는 하던 일을 그만두었다. 그런데 그 사람 다음 순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라고 쓴다. 내가 쓰고 있는 소설에서 상상의 시대에 사는 메리에게는 하던 일을 마치고 노크 소리를 듣는 시간 사이에 간격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메리라는 인물을 만든 나는 전혀 그러한 상상의 시간 속에 살고 있지 않다. 나는 그 문장의 전반부와 후반부를 쓰는 사이에 3시간 동안 가만히 앉아서 메리에 대해 곰곰이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메리가 내 책에 등장하는 유일한 인물인 듯이 메리에 대해서만 내 마음대로 오랫동안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면서 보는 시간은 메리의 시간(이야기에서 등장하는 시간)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물론 이것은 완전한 설명은 되지 못하지만, 내가 진리라고 믿고 있는 것을 어렴풋이 나타낼 수는 있다. 작가가 소설을 쓸 때 상상 속의 시간 안에서 서두르지 않듯이, 하나님은 이 우주의 시간의 흐름 속에서 서두르지 아니하신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을 위해 무한한 애정을 보존해 두고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더기로 다루실 필요가 없으시다. 당신은 마치 하나님이 만드신 유일한 존재인 듯이 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세상에 있는 유일한 사람인 것처럼 당신 개인을 위하여 돌아가셨다.
나의 설명은 다음과 같은 면에서는 실패하고 있다. 나의 설명에서 저자는 하나의 시간의 흐름(실제의 시간)에 들어감에 의해서만 또 하나의 시간의 흐름(소설 속의 시간)에서 나올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간의 흐름 속에 사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의 생명은 우리의 생명처럼 순간순간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생명은 언제나 현재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생명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
시간을 우리가 걸어가야 하는 직선으로 묘사한다면, 하나님은 그 직선이 그려져 있는 종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그 직선의 여러 지점을 차례로 지나가야 한다.
우리는 A 지점을 지나야 만 B 지점에 이르며, B 지점을 통과해야 C 지점에 이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직선을 위 또는 외부 또는 사방에서 포함하고 계시며, 그 직선 모두를 보신다.
이러한 생각은 기독교 안에 있는 몇 가지 분명한 난제를 제거해 주기 때문에 고려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나는 기독교인이 되기 전에는 다음과 같은 반대 의견을 지니고 있었다.
기독교인들은 어디에도 계시며 온 우주를 운행하게 하시는 영원하신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그렇다면 그가 어린아이였을 때나 잠들었을 때는 어떻게 온 우주를 운행하게 했는가, 어찌 그가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제자들에게 나를 만진 자가 누구냐고 묻는 인간일 수 있느냐”라고 말했었다.
당신은 “그가 어린아이였을 때”라는 말과 “동시에”라는 말속에 시간이라는 가시가 들어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나는 하나님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생명은 시간 안에 있었으며, 내가 군대에 복무한 기간이 내 전체의 수명 중 짧은 기간인 것과 같이, 팔레스타인에 살았던 인간 예수로서의 그리스도의 수명은 그 시간 중에서 짧은 기간이었다고 가정하고 있었다.
아마 우리 대부분이 이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의 인간적 생명이 아직 도래하지 않았을 때도 살아 계셨으며, 그 인간적 생명이 현존하는 시기에도 살아 계셨고, 인간적 생명을 과거의 것으로 보게 될 시기에도 살아 계시다.
아마 이러한 생각들은 현실에 있는 어떤 사실과도 부합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그리스도가 팔레스타인에서 사셨던 지상생활을 시공을 초월하는 하나님으로서의 생활과 관련된 시간관계에 맞추어 넣을 수 없다.
인간의 본성과 인간적인 연약함, 졸림, 무지 등을 경험하는 것은 어떻게 해서든 하나님의 거룩한 생명 안에 포함된 영원한 진리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하나님 안에 있는 인간의 수명은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 역사 안에 있는 특별한 기간(주 후 1년부터 십자가에 달릴 시기까지의 기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 생존의 역사 안에 있는 기간이기도 하다고 상상한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역사가 없다. 하나님은 너무나 철저한 실제이시기 때문에 역사를 가지실 수 없다.
물론 역사를 가진다는 것은 당신의 시제 일부를 상실했다는 것, (왜냐하면 역사란 이미 과거로 흘러간 시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직 또 다른 일부분을 소유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왜냐하면 그것은 아직 미래에 있기 때문이다)을 의미한다.
사실 현재라는 것은 매우 짧은 순간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가 그것에 대해 말하기도 전에 사라져 버린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그런 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금하신다.
하나님이 시간 안에 계시는 유한한 존재라고 믿을 때 등장하는 또 하나의 난제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을 조금이라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은 우리가 내일 무엇을 할 것인지 아신다고 믿는다. 하나님이 내가 하려고 하는 일을 알고 계신다면 나에게는 달리 행할 수 있는 자유가 없지 않은가?
여기에서도 하나님은 우리 인간처럼 시간을 따라 진행하고 계시며 하나님과 우리의 차이점은 하나님은 앞을 내다보실 수 있고 우리는 그러지 못한 것으로 생각하는 데서 어려움이 비롯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이 우리의 행동을 예견하신다면, 우리가 그러한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시간을 벗어나 초월하여 계신다고 가정해 보라. 그러면 “내일”이라고 부르는 것은 “오늘”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에게 보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에게는 모든 날이 현재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어제 행한 일을 기억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지금 그것을 행하는 것을 보고 계신다. 당신은 어제라는 날을 상실하지만, 하나님에게는 그러한 일이 없다. 하나님은 당신이 내일 행할 일을 예견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그것을 행하고 있는 것을 보신다. 왜냐하면 당신에게 있어서 내일이란 아직 임하지 않은 미래이지만, 하나님에게는 현재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하나님은 당신이 행하고 있는 것을 아심으로 이 순간 당신의 행동이 조금이라도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당신 내일의 행동도 같은 방법으로 알고 계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미 내일 안에 계시며 당신을 보실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은 당신이 그 행동하기 전에는 당신의 행동을 모르신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때도 당신이 그 행동을 마치는 순간은 이미 하나님에게는 현재이다.
이러한 사상은 나에게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위대하고 지혜로운 기독교인들이 그것을 주장했으며 그 안에는 기독교를 반대하는 것이 없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기독교적인 사상”이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이나 신조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그것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아도 당신은 매우 선한 기독교인일 수 있다.
이 글은 하나님이 시간에 속하지 않으시며, 시간 밖에서 모든 순간을 동시에 보고 계신다는 기독교적 사고를 설명하고 있다. 인간은 과거, 현재, 미래를 순차적으로 경험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시간을 항상 현재처럼 보실 수 있는 영원한 존재임을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은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시는 영원한 분이시며, 모든 시간을 지금처럼 바라보시기에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의 선택도 존중하신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사랑받는 단 하나의 존재다.
자신이 이해한 것을 말로 풀어내어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도록 돕는 것도 하나의 달란트다.
이 책은 나에게 술술 읽히는 책은 아니었다. 오히려 여러 생각거리를 던져주어서, 자꾸 멈춰서 곱씹게 만들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고, 기독교인이라고 말하지만, 마음속 깊이 스스로에게 의문을 던진 적이 많았다.
‘정말 나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모태신앙이다. 크리스천들 사이에서는 우스갯소리로 '못해 신앙'이라고도 불리는 그 신앙.
이 부류는 보통 청년의 때에 많이 떠난다. 어렸을 때 부모님 손 붙들려와 교회 안에서 지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머리가 커가고, 세상의 재미를 알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교회를 떠나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어른이 된 후에 믿게 된 사람이 모태신앙인보다 더 깊은 믿음을 가진 경우가 많다.(C.S루이스도 그렇다.) ‘믿음’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다 믿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성경에서도 분명히 말하고 있다.
마태복음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세상에는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면서, 삶의 모습이 안타까운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기독교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겐 그런 이들의 모습이 기독교 전체로 비치기도 한다.
한 지인은 직장 내에서도 믿는다고 하면서, 신앙이 있다고 하면서 행동을 그지깽깽이 같이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해주었다.
교회에 가는 목적은 예배를 드리러 가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나의 시간, 교제하는 시간인 것이다. (물론 교회뿐만이 아니라 일상생활까지 예배로 이어지는 것이 이상적이다. 그래야 삶을 믿음으로 살아 낸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따금 예배를 드릴 때 시간의 흐름을 가늠하지 못할 때가 있다. 그 순간만큼은 하나님과 대화한다고 생각한다. 알 수 없는 그 끌림이 내 마음을 정화시키며, 안정감을 준다.
요한복음 4:23-24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가끔은 이 신앙이 내가 어릴 때부터 익숙하게 훈련되어 온 습관이 아닌가 싶어 의심해보기도 한다. 이성적으로도 판단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믿는 것은(사실 믿어지니깐 믿는 거다. 어쩌면 믿기로 한걸 수도 있다. 그걸 ‘은혜’라고 부른다) 그 시간을 통해 내가 하나님 안에 있을 때, 내 삶이 더 온전해진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많이, 어렵다.
내 안의 자아가 깨지는 일이라고도 한다.
이 책은 무신론자였다가 기독교인이 된 C.S 루이스의 생각을 진중하게 담고 있다. 모태신앙인 나에게는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던 틈들을 루이스는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내가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을 하나씩 짚어주며 질문하게 만들었고, 나도 모르게 함께 고민하게 되었다.
이런 생각들이 떠오를 때마다 머릿속이 복잡해지지만, 그래도 이런 사유의 시간들이 결국은 나를 어딘가로 이끌어줄 것이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오늘도 묵상하며 흘려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