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다시 올 수 있을까

산티아고순례길. 팜플로나 - 푸엔테라레이나 24km

by 실버레인 SILVERRAIN


팜플로나에서 푸엔테라레이나로 걷는 날. 오늘도 새벽에 일어났다. 숙소에 간단한 조식이 준비되어 있어 빵 두 쪽과 커피를 마시고 출발했다.

대략 24km 길다고도, 짧다고도 느껴지지 않는 적당한 거리이다. 팜플로나를 빠져나오며 좁은 골목길, 주택가, 공공건물, 공원, 고속도로 순으로 점점 주변이 변하는 걸 체감했다. 중심가로부터 외곽으로 빠져나오는 도시의 특성과 문화를 생각해보기도 한 길이다.

도시 풍경에서 스페인 농촌 풍경으로 확 바뀌며 걷는 길이 지루하지 않았다. 중간중간 순례길 화살표가 있어서 길을 잃지 않았고, 또 앞 뒤로 순례자들이 나의 지도가 되어주기도 했다. 스페인에서 온 아주머니, 영국에서 온 친구 등 많은 이들과 '부엔까미노'를 말하며 웃음을 주고받았던 기억이 난다. 잠시잠깐 그 몇 초지만 인사 속에 서로를 응원하는 마음을 듬뿍 담았다.

4~5월에 오면 이 길에 유채꽃밭이 드넓게 펼쳐진 걸 볼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늦가을이라 보지 못해서 너무 아쉬웠다. 대신 생기 없고 말라가는 해바라기밭을 보았는데 처음엔 섬뜩했다. 몇 백, 아니 몇 천 개의 해바라기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어 마치 전쟁에 나간 군인들이 풀 죽어있다는 상상을 하게 했다.

힘들어 지칠 때 즈음 마을이 나타나 쉬고 가기로 했다. 이름도 모르고 국적도 모르는 사람이 더 많지만 저 속에 있으면 다 친구인 느낌이다.

중간 마을이 나와 앉아서 쉬는 순례자들

처음 보는 이와 자연스럽게 말을 주고받는다.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용서의 언덕이라 불리는 Alto del Perdon. Perdon은 스페인어로 '용서'를 뜻한다. 과거 순례자들이 알토 델 페르돈을 지나면서 죄를 용서받는 장소로 여겨졌다고 한다.

정상에는 철제 순례자 조각상이 있는데 이곳의 상징이다. 조각상은 고난 속에서도 신앙을 잃지 않는 순례자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나는 이곳에서 내가 살아오면서 만났던 사람들을 생각했다.

짧은 만남이라도 서로의 인생에 영향이 미쳤을 텐데 나도 모르게 그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는지 또 내가 용서하고 품어야 할 사람은 누구인지 생각해 본 시간이다.

언덕을 내려가는 길

오늘은 계속 편안한 분위기의 전경이다. 길을 잠시 잃었지만 급하게 갈 필요도 없고 '더 걸으면 좋지'하는 마음으로 걸었던 것 같다.

피피와 미미

걷다가 프랑스에서 온 부부를 만났다. '피피와 미미' 자신들을 그렇게 불러달라고 했다. 사실 진짜 이름도 알려줬는데 생각이 나지 않는다. 저 별칭이 너무 강렬해서. 어제부터 마주쳤는데 아는 체 먼저 해주고 순례길 위의 응원의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나도 언젠가 내 짝꿍과 함께 올 수 있을까?' 생각해 보는 만남이었다.

이 마을에서 잠깐 길을 헤맸다.

오늘 살짝 해프닝이 있었다. 길을 가다가 어젯밤 예약한 알베르게가 취소되었다고 메일이 왔다. 걷는데 갑자기 너무 당황했다. 오늘 잘 곳이 없으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들며 빨리 카페에 가서 알베르게에 전화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걸었다. 카페에 도착해서 전화를 걸었다.

일단 내 방은 맡아준다고 3시까지 오라고 해서 열심히 갔다. 시에스타로 문 닫기 4분 전 도착해서 체크인을 했다. 알고 보니 예약을 한 신용카드가 결제가 승인되지 않아 다른 카드를 등록해 달라고 재요청 메일이 왔었는데 내가 확인을 못하고 그냥 지나친 것이었다. 예약 메일이 하도 많이 와 있어 한 번 컨펌이 나면 안심하고 신경 쓰지 않은 내 탓도 있다. 아무튼 오늘 일로 메일을 좀 더 꼼꼼히 확인해야겠다고 되새기며 숙소에 체크인을 했다.

골목길이 한적하다.

이렇게까지 사람이 없다고?

알베르게 근처에 있는 마트에 가서 장을 봤다. 이것저것 사들고 왔다. 오늘 저녁은 마켓에서 산 타코. 배가 고파서 그런지 엄청 맛있게 먹었다.

이렇게 보면 걷고 배고프면 먹고 힘들면 쉬고 숙소 구해서 자고. 참 단순한 순례길인데:) 오늘도 하루가 흘러감에 감사하며 잠을 청했다.


keyword
이전 08화흔적 찾아다니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