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순례길. 베르시아노스 - 만실라 26.1km
아침 일찍 알베르게 주인장이 카페를 열었다.
오늘의 아침
커피 맛은 이곳이 유난히 좋았다.
첫 모금에 입안을 감싸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우유의 질감,
에스프레소의 깊은 농도,
대신에 고소하고 진한 견과류 향,
달콤 쌉쌀한 뒷맛이 스며든다.
커피를 좋아한다. 무척
카페에 볼 게 많아 눈 굴리며 열심히 감상하는 중
알베르게 1층에 있는 카페이다.
옆에 앉으신 순례자아저씨들은 자전거 순례를 하신다.
밥 먹고 있는데 주인장이 앨범을 하나 가져왔다.
당신도 순례를 많이 하셨다고 하며 그간의 찍은 사진들을 우리에게 보여줬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겨울은 사람도 없고 미끄러워 순례하기 많이 힘든데..
이 여정에 대한 사랑이 느껴지는 사진이다.
바흐레이와 조지는 나중에 만나기로 했다.
오늘은 나 혼자 출발한다.
바람이 불고 안개비가 내린다.
모자 푹 뒤집어쓰고 가는 길
얼굴에 미스트 뿌리며 걷는 듯한 느낌이 든다.
마을에 도착했는데 고양이 한 마리가 우두커니 서 있다.
내 앞으로 와서 '야옹'
이 나라 고양이들 친화력이 너무 좋다.
카페에 들어왔다.
안개비였지만 오랫동안 맞으니 머리도 젖고 옷도 젖었다.
재정비가 필요했다.
인테리어에 관심이 많고, 그런 공간을 바라보는 걸 좋아한다.
흰 벽에 원목 소재 벽을 더하니, 조리대와 한 쌍이 되어 공간 전체가 훨씬 더 따뜻하고 포근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순례길에서 만나는 bar(카페)들은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녹아든 공간이 많다. 카페마다 주인장의 취향과 가치가 고스란히 담긴 인테리어를 바라보는 것은 순례길에서 누릴 수 있는 특별한 묘미이다.
그런데 미니멀 추구는 하지 않는 것 같다.
벽 한쪽을 메운 순례자들의 편지들
머리가 축축하다. 비에 젖은 머리 위로 바람까지 불어 뒤엉킨 머리는 쉽게 빗어지지 않았다.
그냥 질끈 묶고는 우비 꺼낼 준비
카페콘레체를 시켰다. 아침에 마신 커피보다 우유맛이 강하다.
나와 눈을 마주친 순례자가 인사를 건넸다.
"Buenos días!"
부에노스디아스! = 좋은 아침이에요
나도 "Buenos días!"
모자도 쓰고 우비를 입었다.
아니, 내 늘어져가는 우비는 비를 피하려고 몸 위에 덮은 것에 가까웠다.
마을을 벗어나
오늘도 어김없이 걷는다.
오늘 걷는 길은 메세타(Meseta) 평원의 특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조용하고 묵상하기 좋은 구간이었다. 대부분이 평지로 이루어져 있고,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 위로 길고 곧은 흙길이 이어졌다.
풍경은 단순하지만, 걸을수록 마음속은 깊어지는 느낌이다.
이 길에서 미국에서 오신 한국분을 만났다. 순례길에 작년에 오시고 이번에 또 오셨다고 했다. 왜 또 오시게 되었는지 인생이야기를 한 보따리 풀어주셨다.
같이 카페에 들렀다.
오늘 간식 많이 먹네..
뭘 먹고 있는지 사람이 옆으로 지나가도 바닥만 쳐다보는 고양이들
이곳은 그동안 와인저장고라고 불리던 곳과 비슷한 형태였다. 조금 더 크고 튼튼하게 보인다.
내 마음대로 황토마을이라고 이름 붙이기
유채꽃 밭이 펼쳐졌다. 시들어가는 해바라기와 달리 아직 한창이다.
바람이 너무 많이 분다.
오늘 묵을 알베르게에 도착
안으로 들어오니 규모가 꽤 컸고 깔끔했다.
레스토랑도 함께 운영 중이다.
안쪽엔 bar도 있고
바람이 멈추지 않는다.
머리 감고 나왔는데 다 엉킬 판
마트에 가는 골목길
화려하진 않지만 걷는 이에게 안정감을 주는 마을이다. 따뜻한 벽과 조용한 골목이, 지친 순례자의 마음을 다독여준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문을 꼭꼭 닫고 있는다고...?
마트 도착
원래 다른 곳에는 간판이 빨간색인데.. 처음에 은행으로 오해해 잘못 온 줄 알았다.
간단하게 장을 봤다. 나는 돌아가 간단하게 저녁을 먹으려고 했는데 만났던 순례자께서 함께 저녁을 먹자고 하셨다.
그분과 그분이 만난 호주 순례자와 함께 식사를 하러 왔다.
순례자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고 로컬 스페인사람들만 있었다. 로컬 맛집이었다.
야채수프
간 야채의 텍스쳐가 입 안에 느껴지며 풍미가 퍼졌다.
가공된 음식을 선호하지 않고 손이 많이 가도 내가 직접 해 먹는 걸 좋아한다. 음식 본연의 맛이 느껴지는 게 좋다.
구운 빵에 찍어먹었고 담백하니 맛있었다.
돼지고기와 튀긴 감자
한국인 입맛에 어색하지 않은 감칠맛 풍부한 소스와 튀긴 돼지고기는 너무 잘 어우러졌고
생감자는 주문 즉시 조리해서 너무 바삭하고 맛있다.
후식으로는 레몬요구르트
바람을 맞으며 숙소에 돌아간다.
바흐레이와 조지를 다시 만났다.
I love you를 포르투갈어로 배우는 시간
Eu amo 바흐레이!
바람이 너무 불어 안으로 들어왔다.
바흐레이가 갑자기 영어로 'I'm happy to meet you'라고 말해줘서 너무 감동받았다.
우리는 서로가 순례길의 선물이라고 말해 주었다.
말에는 힘이 있다.
생각을 변화시키고 느끼게 하는, 또 행동하게 하는
그래서 말 한마디에 천냥 빚을 갚을 수 있는 것이다.
너무 장황했지만
너는 선물이라는 말이 좋았다고 말하고 싶었다.
바흐레이가 갑자기 와인을 사주겠다며 마시자고 했는데 밤늦게 마시면 새벽에 콩닥콩닥 가슴 뛰는 소리에 잠을 못 자고 머리 아플게 뻔했다. 어제 나 조금 마시고 얼굴 빨개진 거 못 봤냐고 하며.. 나는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다. 브라질에서 바흐레이는 와인을 거의 매일 마신다고 했다. 못 마시는 내가 웃겼는지 장난치며 계속 마시라고 한다. 나는 타협점으로 논알코올레몬비어를 시켰다.
그 뒤로 머리색깔 이야기하다가
가족이야기 하다가 -
우리 엄마와는 한 살 차이가 났는데 아들들이 벌써 결혼을 했고 손녀도 있었다. 그리고 가족끼리도 아주 돈독했다. 브라질은 주말에 대가족이 모여 같이 식사를 하는 문화가 있다. 브라질 사람들의 따뜻하고 공동체적인 성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문화 중 하나이다. 한국도 예전엔 그랬었는데.. 지금 본받아야 할 정신이라고 느껴진다.
만나면 괜히 기분 좋아지는 사람들이 있다.
언제나 진심으로 다가와 주는 사람들.
말이 다 통하지 않아도, 마음은 충분히 통했고
우리는 서로를 있는 그대로 응원했다.
내일도 Vam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