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순례길. 테라딜로스-베르시아노스 23.2km
무릎보호대 착용하고 나갈 준비 중
캐나다에서 온 간호사 할머니와 안면을 트고 인사를 했다.
내 윗 침대에서 주무셨는데 코를 심하게 골아 우리 방 사람들이 새벽에 다 깼다. 그리고 한국인 순례자 한 분은 술에 만취하셔서 새벽에 토하고 그 상태로 막 돌아다니시고... 잠을 잤는지 샜는지 정신이 없는 아침이다.
아무튼 간호사 할머니는 당신의 인생이야기를 들려주시며 순례길에 잘 왔다면서 내 앞날을 응원해 주셨다. 감사합니다.
오늘도 바흐레이랑 조지를 기다리며 아침을 먼저 먹는다.
오렌지주스와
빵으로 든든하게 시작했다.
어제 오후 시끌벅적했던 정원뜰엔 아무도 없고 고요하다.
눈에 한번 더 담기
저기 그들이 손을 들며 내게로 온다.
어젯밤 소동을 바흐레이에게 손짓 발짓 소리까지 내며 열심히 설명 중
바흐레이는 아주 잘 자서 컨디션이 좋다고 했다.^_^
오늘도 해가 뜬 후 출발이다.
앞뒤로 순례자가 없는 걸 보니 우리가 마지막 출발조인 것 같다.
조지가 발이 아파 뒤쳐져 우리는 구글앱번역으로 소통하는 중
바흐레이가 브라질 꼭 놀러 오라고 했다. 브라질 바베큐를 대접하고 잠도 재워주겠다고... 정말 갈게요!
구름이 싸-악 끼더니
무지개를 보았다.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
창세기 9:13
그 사방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엎드려 말씀하시는 이의 음성을 들으니라
에스겔 1:28
곱씹어보는 성경구절
바흐레이가 호기심에 구경하자고 해서 발을 멈췄다.
무덤 같은 이곳은 와인저장고라고 한다.
나 혼자였으면 빨리 가려고 쌩 지나쳤을 텐데 순례길을 온전히 느끼고 있는 바흐레이 덕분에 나도 여유를 갖고 걷는다.
검은 고양이 네로
갑자기 그네 타는 바흐레이
갑자기 운동하는 조지
어디로 튈지 모른다.
뜨개로 만국기를 만들어 장식해 놓았는데
왜 태극기만 없는 건지..!
건곤감리와 태극문양이 어려웠나
꽤 오랜만에 허수아비를 본 것 같다.
한국에서도 보기 힘든데 반갑다
길 찾고 있는 중
무화과나무를 어떻게 알았는지 조지가 무화과를 따왔다.
‘맛있겠어?’ 의심했는데
맛있다.
꿀같이 달다.
같이 걸어서 순례길 10배는 풍요로워진 것 같다.
‘한국인이나 아시안친구들과 걸었으면 이렇게까지 멈추고 즐기며 걷을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보는데 지금까지 만난 순례자들의 데이터로는 아닐 것 같다.
오늘 이들은 선착순 알베르게에 묵을 예정이었는데 아주 여유를 부렸다.
“자리 없으면 어떡해 걱정 안 돼?”물었더니
“다른 알베르게에도 방은 있을 거야 걱정 안 해”라고 말했다.
이런 여유를 배워야 하는데..
다음 대도시 레온까지의 마을들을 보여주는 표지판
많은 순례자들의 소원을 가진 비석
뭐라고 빌었을까 궁금하네
여기도 캠핑 중
오솔길 따라 얼마나 걸었을까
저기 우뚝 솟은 나무 양 옆으로 [ ] 모양의 기둥이 있는데 저곳이 프랑스 순례길의 절반 지점이다.
바흐레이가 너무 좋아했다.
기념사진
이 부부는 바흐레이가 어제 알베르게에서 만난 부부인데
브라질에서 왔다.
딸이 순례길의 한 도시인 팜플로나에서 공부를 시작한다고 했다. 학교를 보낸 후 부부는 순례길에 왔다. 이제 다 키웠다, 내 손 떠났다며 웃으며 말하는데 그들에게서 참 좋은 부모의 향기가 뿜어져 왔다.
언젠가 결혼을 하게 된다면, 지혜롭고 성숙하게 자녀들에게 본이 되는 부모가 되고 싶다. 문득 내 부모님이 떠올랐고, 성경 속 잠언 31장의 현숙한 여인의 모습도 자연스레 생각났다.
할아버지가 언젠가 나를 회중으로 두고 이 본문으로 설교하신 적이 있다. 그때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확 와닿아 저 잠언 31장을 마음속에 품고 있다.
가정을 꾸리고 싶은 소망이 예전부터 있었고 나는 그게 빨리 이뤄질 줄 알았지만..ㅎㅎ 카이로스의 시간에 가장 완전한 방식으로 나에게 맞는 돕는 베필을 허락하시리라 믿는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베필을 만들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2:18
갑자기 한 짤이 생각나네
'정신 차려 이 각박한 세상 속에서'
바흐레이는 사진 찍느라 바빴고 나는 옆 테이블에 앉아 저 부부와 이야기를 시작했다. 브라질 언어와 문화 등 궁금한 거 다 물어보기
자연스레 그들이 합류해 일행이 더 생겼다.
안에 조각상이 있는 줄은 몰랐네
한 번,
두 번,
그리고 아쉬워 여러 차례 계속 뒤를 돌아봤다.
너무 생생하게 묘사를 잘했다.
벽에 작품을 그려놨다.
중간 쉬어가는 마을에 도착했다.
배고파서 레스토랑을 찾아다니는 중이다.
비가 한 두 방울 내려 바흐레이는 판초를 꺼내어 입었다.
비 맞아도 신난 우리들
순례길 첫날엔 이렇게까지 친해질 줄은 몰랐다. 인연이 되어 너무 감사하다.
찾아간 레스토랑은 오픈 전이다.
빗방울이 굵어져 나도 우비를 꺼냈다. 생장 첫날부터 함께했던 이 5유로짜리 비닐 우비는 목부분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결국 밥은 포기하고 카페에 가기로-
간단한 간식 주문
술 못하는데 바흐레이가 와인 이름을 알려주며 마시라 권유해서 시켰다. 와인 생산지답게 저렴하기도 했고 언제 먹어보겠어 하며 시켰는데 아니나 다를까 한잔도 아닌 반잔에 얼굴은 홍당무가 되어버렸고 바흐레이는 엄청 웃으며 걱정해 주었다. 나는 알코올 분해효소가 눈곱만큼도 없는 것 같다.
<화이트와인>
스페인어: vino blanco
포르투갈어: vinho branco
<레드와인>
스페인어: vino tinto
포르투갈어: vinho tinto
이 정도면 거의 같다고 해도 무방하지 않나?
두 언어가 비슷해 서로의 언어로 말해도 소통이 가능하다.
개가 더웠나 보다.
물에 발을 담그고 가만히 서 있다.
묵묵히 기다려주는 주인도 멋있다.
이제 쭉쭉 간다.
순례길 옆으로 난 (무늬만)차도
바흐레이가 저 볏짚 위에 올라가 보고 싶다고 해서 잠시 멈췄다. 나도 결국 올라갔다.
순례자들이 걷기 딱 좋게 나무가지치기가 참 잘 되어있다.
순례길에서 드물게 보이는 현대적 분위기의 건축물에 '오잉'
마을에 도착했다.
그럴듯한 자전거 그림
이 마을은 공실도 많이 보이고 밤에 돌아다니면 무서울 듯하다.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뭔가 제멋대로인 화분들
약간은 정신이 산만하다.
숙소는 순례길 중 가장 좋지 않았다....
바흐레이와 조지는 여유 있게 알베르게에 들어갈 수 있었다.
나에게 같이 가자고 제안했지만 이미 예약을 해서 나는 이곳에 묵었다.
저녁은 마트에서 사 온 멕시칸토르티야
힘들어 얼빠진 표정으로 먹는 저녁이다.
오렌지주스가 날 살리네
우연한 만남은 없으며 소중한 인연에 감사하는 하루다. 혼자서 길을 걸었던 날들, 그리고 누군가와 함께 걸었던 날들.
‘혼자’와 ‘함께’—그 두 시간 속 저마다의 배움이 있다. 나에게는 모두 꼭 필요한 시간이었음을 느낀다. 나는 매 순간, 삶이 건네는 메시지를 놓치지 않으려 한다. 마주하는 순간순간들을 배움의 기회로 삼고자 한다.
사람을 배우는 순례길이다.
세상에 홀로 이루어지는 일은 없으며, 우리는 결국 사람을 통해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일단, 옆에 있는 사람한테 잘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