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를 써보고 다시 읽어본 사람들은 안다. 그만큼 민망함에서 비롯된 웃음이 나오는 일도 없다. 마치 본인이 홀로 기획하고 연기하고 촬영한 연극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다. 일기 속에서 나는 신과 같으며, 때론 철학자로, 때론 낭만주의자로 등장한다.
올해 초 나는 대한축구협회 인턴 기자 지원을 준비했다. 그리고 서류전형에 합격했다. 살면서 가장 기쁜 날 중 하나였다. 결과론적으로 떨어졌지만, 실패는 꼭 다른 실패를 불러오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나는 일기에 ‘몸이 불편해야 좋아하는 것을 얻는다.’라는 문장을 적었기 때문이다. 일기를 보지 않았다면 내 안에서 영원히 사라질 문장이었다. 나는 예전의 나에게서 또 하나 배웠다.
글이 위대한 건, 같은 모습이라도 읽는 이의 상황에 따라 다르게 이해되기 때문이다. 앞선 문장은 분명 내 꿈에 대한 일을 앞두고 적었다. 연인으로 대표되는 사이에서도 충분히 통용된다고 본다.
아빠는 생전에 잘생긴 남자였다. 시간이 키를 작아지게 하고, 얼굴에 주름을 새겨도 누구나 인정할 만큼 잘생겼었다. 내 머릿속에서 기억이란 게 쌓일 무렵부터, 난 아빠는 인물이 좋다고 생각했다. 외모지상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엄마는 아빠에게 걸맞은 여자는 아닌 것처럼 보인다. 엄마는 야무지고 드셌다.
그렇다고 소위 말하는 ‘돈’ 때문에 한 결혼은 아닌 것 같다. 두 집 모두 잘 살았다. 할아버지는 의사였고 서울의 한 ‘동’의 대부분 땅을 가질 만큼 부호였다. 엄마 쪽도 어릴 때 ‘식모’가 집에 있을 만큼 괜찮게 살았다고 한다.
“아빠는 엄마를 사랑했을까?” 이젠 당사자 모두에게 들을 수도 없으니 답이 없는 궁금증이었다. 다만, ‘사랑’이라는 다소 새롭지 못하면서도 낭만적인 단어만 내 머릿속 답안지에 남은 건 다행이다. 때론 불편한 진실보다 달콤한 거짓이 좋은 법이니까. 이쯤에서 일기 속 문장을 살짝 바꿔본다. "몸이 편하니 불편한 것을 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