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과因果
내가 세상에서 첫 숨을 마셨을 때, 순백의 도화지와 같았을 거다. 시간이 흐르면서 내가 아는 세상은 점차 커졌고 그 모든 순간 깊숙한 곳엔 아빠가 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그 사람만이 아니라 그가 불러오는 모든 것을 함께 만난다. 내게 아빠는 한 명의 사람이 아닌, 내가 살던 집과 교육 환경, 가치관, 습관, 행동 등 삶 전반에서 영향력을 끼친 사람이었다. 돌아보면 지금의 나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내 모든 것엔 이유가 있다. 내 발자국을 보면 아빠에 대해 좀 더 정리되지 않을까.
적을 만들지 말자. 사고 치지 말자.
지금도 이 생각은 내 사고 전반에 자리 잡고 있다. 나는 어린 시절 가난이 뭔지 알았다. 초등학교 저학년까지 단칸방에 네 식구가 살았다. 형은 지금과 달리 소위 말하는 사고 치는 애였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내 방이 생길 때쯤 형은 집을 나가 살았다. 이런 상황에서 내게 중요한 건 사고를 치지 않는 것이었다. 난 단 한 번도 친구와 말다툼으로라도 싸워본 적 없다. 오해의 시작을 불러오는 말을 하지 않게 됐고, 가벼운 장난도 치지 않는다. 지금도 누군가를 장난으로 친다던가, 무시하는 발언을 하지 않게 몸에 배었다. 집안의 가장은 많은 책임을 진다. 가장으로서 아빠는 최악이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영향받은 지금의 나는 내 성품에 만족한다.
책과 긍정적 사고
집에 놀 거리가 없다 보니 어린 시절 취미는 책 읽기였다. 학교나 동네 도서관엔 재밌는 책이 많았고, 결정적으로 공짜였다. 만화책부터 소설, 문학까지 다양하게 읽었다. 그중 위인전은 내 희망이었다. 책 속 주인공들은 하나 같이 어린 시절 가난했고 힘든 역경을 견디며 결국 훌륭한 사람이 됐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보며 ‘나도 이렇게 되려고 지금 이렇게 사는구나’라고 생각했다. 덕분에 공부를 미치도록 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놓지 않았다. 독학만으로 서울 안에 대학을 간 건 큰 행운이었다. 아빠는 내가 책을 읽거나 공부할 때 크게 방해한 적이 없다. 돌아가시고 나서 형이 전하길, 아빠는 내가 대학을 간 걸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역사, 축구, 게임
지금도 그렇고 어려서도 그렇고 이상하리만치 역사를 좋아했다. 역사에 관련된 거면 드라마고 책이고 다 봤다. 아마 아빠 옆에서 사극을 본 게 영향이 컸을 것이다. 처음 꿈이라는 게 생기고, 그 목표가 ‘역사 선생님’이었던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한 번은 알지도 못하는 ‘평화의 댐’에 함께 가기도 했다. 그 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았을 땐 한참 뒤였다.
내가 어릴 적만 해도 동네 친구들과 나가서 노는 게 일상이었다. 보통은 축구를 많이 했다. 지금도 보는 것과 하는 것 모두 좋아한다. 컴퓨터가 생기고 나서는 게임을 많이 했다. 훗날 내가 축구 기자를 꿈꾸고, 지금은 게임 회사에서 일하는 걸 보면 다 운명 같다.
게으름보다 큰 책임감과 부지런함
아빠나 나나 돌아보면 천성은 게으른 것 같다. 집에서는 누워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자기 계발보단 노는 걸 좋아했다. 그런데도 책임이 따르는 일에는 철저하게 부지런했다. 아빠도 나도 출근을 하거나 학교에 갈 땐 여유 있게 간다. 아침 일찍 목적지에 가야 하면 더 빨리 일어난다. 이런 습관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나 역시 출근 시간보다 항상 1시간 빨리 간다. 그리고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일어난다. 힘들지만 이르게 시작하는 하루를 좀 더 알차게 채우기 위해 노력 중이다.
나를 천천히 돌아보면 결국 부모님, 형제가 가장 많은 영향을 내게 미쳤다. 내 가정과 가족은 내 첫 학교이자 선생님이다. 부정하고 싶어도 사실이다. 그들이 알게 모르게 가르쳐 주는 걸 받아들이는 거는 결국 내 문제다. 그걸 어떻게 풀어가냐가 정말 중요하다. 나는 최대한 긍정적으로 모든 걸 바라봤다. 그게 아니면 너무 힘들 것 같아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