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도 노력해야 하는 관계다
아빠랑 난 참 서먹서먹했다. 난 형 같은 능청스러움도, 동생의 귀여움도 가지지 못했다. 아빠 생전에 나는 말수도 지금보다 현저히 적었다. 그나마 조금씩 대화를 가지게 된 건 입대 전후다. 형이 사고로 인해 군대에 못 가면서, ‘군대’는 집안에서 아빠와 나만 아는 주제였다. 별다른 대화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기억에 남는 일 중 하나였다.
점점 자라고 집안 형편이 나아지면서 내 방이 생기고 문이 생겼다. 내 공간이 생기는 건 기쁘다. 그러나 문은 소통의 창구보다 단절을 만들었다. 그렇게 멀어졌다. 혼자 있는 게 편했다. 그때의 난 그게 너무 편하고 좋았다. 그러나 한 번 생긴 거리감은 좀처럼 좁히기 어려웠다.
한때 가족, 형제, 친척 등 피로 맺어진 인연은 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아빠의 장례식 때 작은아버지와 동사무소와 경찰서에 갔다. 십수 년 연락이 안 된 형제들 연락처를 구하기 위해서다. 정보 보호와 관련된 법도 있었기에 끝내 연락처를 알 수 없었다. 애초에 평소 연락을 하고 만나는 사이였다면 이럴 일도 없었다. 하긴 작은아버지도 몇 년 만에 겨우 만났으니 이상할 일도 아니다.
가족 사이도 애쓰고 노력해야 하는 관계였다. 항상 부모님이나 형에게 보호를 받는 나였다. 아빠의 병원 입원, 수술, 퇴원, 장례식을 겪으면서 나는 더는 보호받는 아이가 아니었다. 난 보호자였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보호자의 위치가 되었고, 가족은 지켜야 하는 존재들이었다. 병원 관계자가 이것저것 물었다.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병은 무엇이 있었고, 먹는 약은 뭐였고, 평소 생활이나 증상 등 아는 게 없었다. 평소 아빠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고, 장례 과정에서도 운 적은 없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울컥하고 슬픈 게 이거였다. 나는 같은 집에 살았지만, 함께 살지는 않았다.
세상엔 당연한 게 없다. 그 어려운 걸 하기에 부모님의 사랑은 위대하다고 하나 보다. 나는 이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같이 찍은 사진 한 장, 함께 기울인 소주 한 잔이 없었다. 내가 평소 서운한 것들을 털어놓은 적도 없다. 나도 노력한 게 없는데 바라는 것만 많았다.
아빠가 대수술이 들어갔을 때, 형이 말했다. 용서하라고. 죽으면 원망할 사람도 없는 거라고. 형 말이 맞았다. 원망해도 달라질 게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