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본
떠남이란 꼭 공간의 개념만 말하고 있지 않다
스위스 베른에서 포르투갈의 리스본을 손가락으로 선을 그어본다. 얼마의 거리를 이동했는지 보고 싶었다. 나라와 나라 사이 몇 센티되지 않아 설핏 웃어본다. 가야 한다는 유혹과 머무르고자 하는 치열한 갈등을 떨치고. 삶의 중심을 벗어나 고속열차로 스물여섯 시간의 날개를 펼치며 날아가는 느낌이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잇따라 읽으면서 지리적인 것이 알고 싶어 졌다. 집에 왔던 딸에게 세계지도가 필요하다고 했더니 구매를 해준 것이 왔다.
리스본에 가보고 싶다. 굴뚝새처럼, 숨었던 데서 벗어나 새로운 곳으로 자신을 찾아 떠난 주인공에게 박수를 보내며. 나도 그럴 수 있다면 하고 바래본다. 훨훨 날아 어디든지 가보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라도 있는 것 아닐까. 그 생각들이 쌓이고 쌓여 언젠가 떠날 수 있는 용기로 뭉뚱그려질 수 있기에 꿈을 꾸고 사는 것일 듯.
떠남이란 꼭 공간이란 개념만을 말하고 있지 않다. 처음 보는 풍경들, 낯선 사람들과 마주한다면 더 좋겠지만. 그것만이 삶의 이유와 가치와 소중한 추억을 담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가지고 있던 생각들을 어느 순간 차이나는 각도와 시각으로 보게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빠른 변화보다는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는 자연스러움. 이별이란 보이는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애착하는 것에서의 놓임을 받아들이는 것이라면. 배인 습성에서 벗어나 내면으로부터의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도 하나의 탈피 일 수 있지 않을까.
시간들이 지난다. 하루하루가 지구본을 한 바퀴 휙! 돌리는 것처럼. 이십사 시간이란 목매어놓은 쳇바퀴의 한계를 누가 끊어 낼 수 있을까. 고문처럼 압박해 오기도 하지만, 은혜임을 알아야 하는 맞설 수 없는 숙명이다. 아무리 떨치고 일어날지라도 맴돌고 있는 거세된 목마름처럼 안고 가야 한다.
어린 날의 여름 너른 풀밭을 찾아 소를 매러 다녔다. 소가 좋아하는 풀이 있는 곳을 찾아 말뚝을 박아 놓으면 하루 종일 소는 그곳에서만 맴돌 뿐이다. 해가 기울 무렵 찾아가 풀을 뜯기 운 뒤에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는 소. 가끔 말뚝을 빼고 남의 밭에 들어가 농작물을 먹어 애를 태우지만 멀리 가지 않는다. 우리도 언젠가는 돌아갈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진, 슬픈 존재들이다.
나에겐 아직 벗어남이 허락되지 않는다. 그것이 현실이며 한계일지라도, 깊은 침잠으로 나를 살피고 내면을 다독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실낱같이 옅은 정신을 튼튼한 동아줄로 북돋아, 강건한 마음의 소유자가 되는 것도 나만의 여행이지 않을까. 부딪히는 것들이 조금은 거리가 있겠지만 처한 자리에서 중요한 가치를 만들어가고 정신의 깊은 샘물을 퍼서 마시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공간으로의 이별도 해보고 싶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올 수 있을 때의 평안한 마음으로서의 비움. 새로운 곳에서의 시간을 통해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은 삶의 풍요로움을 앞당길 수 있지 않을까. 젊음이 비껴간 오후의 옅은 빛 속에서의 바램이자 설렘으로, 언젠가 석양의 찬란한 빛 앞에 서보기를 소망한다.
지구본은 여행을 떠날 때를 기약으로 옆에 두어야겠다. 읽기와 기도와 주어진 생활에서의 범위를 확대하여 넓은 마음의 영역을 넘나들어 볼 생각이다. 세세히 고샅을 탐색하듯 이곳저곳을 누벼보고자 한다. 지금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