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것들이 주는 위로

새소리는 꽃잎 음표

by 민진

딸이 온다기에 가까운 휴양림으로 일박 이 일을 예약했다. 일상을 멈추고 싶었다. 딸은 아파서 못 오고 남편, 아들 둘과 오후 느지막하게 그곳으로 향했다. 짐을 풀고 천천히 산길을 걸었다. 떨어진 도토리를 살피며 다람쥐가 있을까? 궁금해하기도 한다. 도토리묵을 만들어 먹으면 맛있을 것 같다는 이야기라든지, 문득문득 떠오른 의미 없는 말들을 주고받는다. 도토리 한 두어 개 주머니에 넣는다. 내가 산에 있었다는 흔적으로 손색이 없을 것 같다. 작지만 영글어 가을을 머금었다. 별것 아닌 것 같은 순간인데 마음이 따스해진다. 평화롭다. 사소한 것들이 주는 위로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저녁을 먹고 아들들이 ‘뱅’ 게임을 하잔다. 어떻게 하는지 모른다 했더니, 어렵지 않으니 가르쳐 준단다. 내 나이 예순하고도 둘, 게임이나 놀이에 서툴러 잘 끼지 않는데 무슨 용기인지 해보고 싶어진다. 넷이서 저녁이 깊도록 게임을 한다. 마피아, 보안관, 무법자, 배신자를 골고루 해본다. 도망가고, 쫓기도 하는 첩보 영화 같은 장면들이 그 오붓한 게임 판에서 펼쳐진다. 새로운 것에 눈 뜬 것처럼, 계속하고 싶어진다. 나에게도 도박 기질이 다분한 것은 아닐까? 나를 참 많이도 억누르고 살아온 삶은 아니었을까? 뒤돌아 본다. 아들들이 그만하자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마무리했다.


아버지는 읍내로 학교 가는 나에게 복권을 사다 달라고 부탁했다. 숫자를 맞추어 보면 당첨된 것이 별로 없었다. 겨우 마지막 한 자리 나 두 자리 맞는 경우를 빼면. 그런데도 아버지는 그 일을 계속시켰다. 그때 알게 된 것 같다. 복권은 절대 사면 안 된다는 것을. 그래서 이 나이 되도록 내 의지로 복권 한 장 사 본 적이 없다. 밤을 새워 화투를 치고 돈이 없으면 양식을 팔아서라도 노름을 하던 아버지의 피는 내 안에도 흐르고 있었다는 것을 게임을 하면서 자연스레 느낀다. 나의 내면 한 자락이 들치어지는 밤이었다.

남편과 나는, 자는 아들들은 두고 아침 산책을 나선다. 정원 작가들이 두 해전 조성해 놓은 산속 정원을 둘러보자고 미리 약속되어 있었다. 시민 정원사로 활동하고 있는 나에게 너무나 보고 싶은 곳. 시간이 흐른 뒤 정원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궁금했다. 조붓한 오솔길을 따라 걸으며 산속의 아침이 주는 상쾌함에 마음이 널을 뛴다. 뭐니 뭐니 해도 자연에 취할 때가 가장 기분이 좋다. 간간이 들려오는 새소리는, 꽃잎 음표 같다. 남편과 주거니 받거니 감탄하며 억새의 손 뻗음 안으로 들어간다. ‘이리 오세요’ 헨젤과 그레텔을 유인했던 길에 들어선 듯, 억새가 하얗게 핀 사이를 지난다. 억새가 꽃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중 바람 따라 흩어지면 씨앗이 된다는 것은? 남쪽이어서인지 십일월 초인데 단풍이 이제야 곱다. 정원에 들어서니 그때의 설렘이 느껴진다. 긴 정각을 만들어 한숨 쉬어가라며 마음을 내려놓게 했었는데. 그곳을 잠시 서성여 본다. 맞은편 산과 마주 서게 한 정원지기의 감성이 느껴진다. 산 아래 숨겨진 정원들을 숨바꼭질하듯이 찾아다닌다. 거지반 꽃들은 지고 바람꽃만이 한창이다. 처음 몇 포기 심지 않았었는데 시간이 그들을 자라게 했을까. 온통 바람꽃으로 하늘거린다. 바위 옆 꼭지윤노리나무의 열매와 잎이 붉다. 눈이라도 올라치면 빨간 열매와 흰색의 어울려짐이 장관이리라.


눈부신 막바지 가을. 멈춘 시간들 사이로 보이는 것들은 다 아름답다. 일상을 멈추고 자연에 마음을 내어주는 것은, 다시 나를 찾아 여물게 하는 것 아닐까.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