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꽃

by 민진

삐죽거리며 잎을 물고 지나온 시절이 지난했을까. 살풋 바람에도 너울거리네. 가느다란 줄기 가운데로 꽃인 듯 아닌 듯 피어나네. 어느 사이 꽃 주머니를 벼렸을까. 연둣빛 속살로 빚은 몸이 파르르. 가슴께까지 끌어올린 사랑의 언어. 나도 꽃이라고. 둥글지도 않아서 꽃이라기엔 허전해. 꽃마다 생김새는 다 다르다고 말하는 것 같다. 인식의 한계를 벗어나는가. 멋모르고 하늘로만 치솟다가 데었는지 바람과 햇살에 발그레해. 고개 숙인 부드러움은 그때부터일 수도.

너풀거리게 하는 바람, 해 살 거리는 물빛. 속살거리며 들이치는 빛 타래. 백로들이 하얀 몸을 띄우더니 날아가. 뿌리내린 붙박이들이 품는 꿈이자 희망이야. 어느 땐가는 내 몸에서 일어선 것들이 가슴을 부풀리고 어느 날 거침없이 바람과 몸을 섞을 거야. 다시 시작되어지는 운명을 찾아서.


깊어질수록 속을 게워내고 노랗게 메말라 가는 얼굴. 보얀 솜털로 피어나는 차마 떨치지 못하는 미련들은 한 몸이 되어 이리저리 쓸려. 사락거리는 사이로 바람은 눅어지고 갈대의 노래가 시작되어 들려와. 연두의 몸피를 벗어버리면 겨울사랑은 목이 마른 뒤척임. 찬바람에 몸을 맡기면 머리 푼 듯 가녀린 몸이 내미는 숨소리는 서걱서걱 사각사각. 쓸쓸히 뒤채면 사무치는 황량함.


겨울 갈밭에 서면. 마음 자락이 노랗게 빛 무리되어 일렁이지. 황금물결 사이로 하늘이 내려앉고 바다는 이미 하나가 되어 흔들려. 겨울바다는 갈대의 풀석거림 때문에 있게 되는지도. 출렁거리는 거대한 물결 앞에 멈추면. 태고의 노래가 들리고 내 안의 서성 임들은 깃발이 되어 펄럭거려. 바람결에 비워내는 속내는 순수를 찾아 갈무리하고. 움직임에 따라 쏠리면 쏠리는 대로 벌써 저만큼 갈밭 속으로 빨려 들어갔는지 몰라. 갈 숲 사이사이로 나는 이미 내가 아니고 새로운 나로 비워지고 있어.

갈꽃이 피는 계절에 다시 섰다.

옥빛의 잎 사이로 빼어 무는 연둣빛 꿈. 살랑거리는 미풍에도 살 곰 흔들리고 지나는 나에게도 제 몸 제살을 다 보여주는. 감출 것 없이 솔직해지는 풋내 나는 사랑. 풀꽃들 마주하며 은빛 그리움을 키우는. 날 선 이파리라도 제 살을 깎아 피워내는 보람.

갈대를 보면 위로를 받아. 현실의 무게감이 조금 감해지는 것 같아서.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신다는 말씀에 기대어 살아온 시간이 되짚어 보여와. 거세되지 않는 올무 앞에서 나를 위무할 밖에 없을 때, 벼려지지 않는 아집 사이로 비추어오는 빛살. 나를 세우는 말들이 손가락 몇 개나 접힐까. 힘 얻는 지각보다는 힘 잃는 것들이 더 많아서 주저앉고 싶을 때. 내 손을 잡고 일으켜 세우던 한마디.

상한 갈대도 갈대라던.


(10월 중순에 다시 찾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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