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소소한 시선이 닿는 순간
가을 날씨가 너무 좋다. 바람도 선선하게 불고, 햇빛도 강하지 않다. 최상의 날씨. 어디 나가서 놀기에 좋은 날씨다. 이 좋은 날씨에 딱 어울리는 그림이 하나 있다. 바로 밀레이의 그림이다. 그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 시기 대표적인 ‘라파엘 전파’ 화가 중 한 명이었다. ‘라파엘 전파’는 라파엘로 이전의 시기, 즉 14~15세기 이탈리아 미술로 돌아가 고전적이고 섬세하며 꾸밈없는 자연을 묘사하는데 목표를 둔 예술 단체였다. 그만큼 낭만적이면서도 사실적이며, 아름다운 그림들을 많이 그렸다. 라파엘 전파의 한 명이었던 밀레이가 그린 이 그림은 가을의 풍경이 잘 담겨 있다. 황금 들녘과 평화로운 분위기가 느껴진다.
그림의 제목은 <눈먼 소녀>이다. 그림 속 소녀는 눈을 감고 있다. 하지만 그 소녀가 처량하거나 안쓰러워 보이지만은 않는다. 그녀의 손을 주목해서 보면, 동생의 손을 꼭 붙잡고 있다. 그렇다. 그녀는 눈이 멀어 세상을 보지 못하지만, 체온을 통해 동생의 존재를 느끼며 행복해하고 있다. 머리를 감싸고 있는 숄은 동생을 감싸고 있다. 눈이 멀었다고 해서, 동생을 보호해주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눈을 뜬 동생이 언니를 의지하고 있지 않은가? 무지개와 황금 들판은 이 두 소녀의 희망찬 미래를 보여준다. 무지개는 ‘약속’을 의미하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존 에버렛 밀레이, <눈먼 소녀>, 1856.
이 그림을 떠올리고 나니, 아름다운 이 풍경을 바라보며 산책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그러다, 산책로에 있는 고양이 집을 발견했다. 겨울이 곧 다가온다는 것을 알려주듯, 누군가 고양이 집을 따듯하게 꾸며놨다. 거기다 혹시 비 와서 고양이 밥이 상할까, 간이식당까지 설치해놨다. 현실 속 <눈먼 소녀>처럼 고양이를 돌보는 사람은 누구일까?
자신의 돈을 들여서 이 고양이 집을 만든 사람이?
그 사람은 분명, 고양이를 사랑하는 사람일 것이다.
사랑은 사람의 시간과 집중을 빼앗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고양이가 비에 맞아 처량해 보였던 것일까?
추운 겨울 속에서 고양이가 얼어 죽을까, 미리 준비해 주는 그 사람. 그 사람의 섬세함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고양이 집 위에 놓인 문구.
‘냥이를 예뻐해주시는 분들~
냥이에게 사람 먹는 음식을 주지 말아주세요.
가능하면 깨끗한 물을 자꾸 갈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냥이는 물을 먹지 못해 질병에 걸리기 쉬워요!
냥이가 건강할 수 있게 배려해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고양이를 잘 알고,
진정한 배려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인 것 같다.
이 사람 덕분에 고양이는 겨울을 잘 이겨 낼 수 있을 것이다. 이 사람의 마음 씀씀이를 보면서, 누구나 마음속에 찾아오는 힘듦을 생각해 봤다.
누구나 힘들지만, 그 힘듦을 이겨내는 사람도 있다.
그 사람들 곁에 혹시 꾸준하게 보호해주는 존재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토닥토닥 해주는 그 존재가 삶의 겨울이 다가올 것을 대비하여 미리 월동을 준비해 준 것은 아닐까?
<눈먼 소녀>의 언니처럼 말이다.
차가운 겨울처럼, 마음이 시릴 때가 있다. 이럴 때는 유독 슬픔, 분노, 배신, 허탈, 우울의 감정이 뒤섞인다. 마음이 무너지고, 몸이 무너질 때가 있을 때. 날 위로해주는 존재들 덕분에 내 삶의 겨울을 잘 견딜 수 있는 것이다.
고양이는 알까?
자기를 위해 월동 준비를 해주는 저 사람의 마음을.
아마도 알 것이다. 온기 가득한 따뜻한 손길로 자신을 쓰다듬어 줬던 사람 중 한 명일 테니.
내 삶의 겨울을 쓰다듬어 준 존재가 있음을,
내 겨울의 월동을 준비해 준 존재가 있음을 돌아보는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