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당만 ‘self’가 있는 것은 아니야

#2. 소박하지만 소담한 일상

by 도슨트 춘쌤
92p, 빈센트 반 고흐, 영혼의 문턱, 1890..jpeg 빈센트 반 고흐, <영혼의 문턱>, 1890.


답답할 때가 있다. 이럴 때는 머리는 아프고, 혼란스러우며, 답이 없어 보인다. 그림 속 남자처럼 말이다. 반 고흐의 <영혼의 문턱>이란 그림은 한 남자의 절망적인 모습을 너무나도 잘 보여준다. 반 고흐는 이 그림을 여러 번 그렸다. 그만큼 절망적인 상황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 그림은 그가 죽기 며칠 전에 그린 작품 중 하나이다. 그를 정말 힘들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경제적 문제였을까? 인정받지 못한 설움이었을까? 무엇이 되었든, 그의 삶은 실패와 좌절로 점철되어 있었던 것은 맞는 듯하다. 그가 살아 있었을 때는 말이다.

나도 며칠간 반 고흐의 심정과 같았다.

제한된 살림살이 속에서 경제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은 쌓여 갔다. 거기다 불안한 나의 미래, 새로운 도전과 육아 휴직 사이의 갈등이 한꺼번에 답을 요구하듯이 날 재촉했다. 시험 종료 1분 전 상황처럼 말이다. 시간은 부족했고, 내 머리는 복잡했다.

삶은 너무나도 어렵다. 막연하다. 해결할 수 있는 답이 적힌 교과서나 로드맵이 없어서 그렇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막연함과 불확실성이 싫다. 앉아서 이 모든 고민을 해결하자니 머리가 터지는 듯했다.

그때, 이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윤두서의 <나물 캐는 두 여인>. 윤두서는 자화상으로 유명하다. 그는 명문가 후손으로서 학문과 예술 모두에 능통했다. 그가 그린 이 그림은 경사진 산 위에서 봄나물을 캐는 여인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아마도 이 여인들은 살기 위해 이 경사진 언덕까지 올라온 것이다.


94p, 윤두서, 나물 캐는 두 여인, 18세기..png

윤두서, <나물 캐는 두 여인>, 18세기.


그렇다. 문제는 식당 정수기에 붙은 ‘self’와 같다. 물을 마시고 싶다면, 일어나서 self로 물을 가져와야 한다. 문제의 해결책은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데 있었다. 그림 속 두 여인들처럼. 먹을 것을 찾아 험한 산까지 왔던 그녀들은 ‘self’를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이것은 윤두서도 마찬가지였다. 정치적으로 소외되었던 양반으로서, 그는 그림을 통해 자신의 문제를 해결했고 삶의 의미를 찾았다.

생각이 정리되자, 난 일어섰다. 그리고 상급자를 찾아갔으며, 전화로 은행의 금리를 알아봤고, 책을 뒤졌다. 요 며칠 사이에 일어난 막연함은 ‘self’로 해결할 수 있었다.

모든 문제가 갑자기 해결되었다. 그 걱정과 고민의 순간이 하찮아 보일 정도로 말이다. 퇴근길은 더 막연하지도, 불확실해 보이지도 않았다! 막연함의 해답은 ‘self’ 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막연함이 올 때, self를 외치며 일어 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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