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조사기관 '유로모니터'에 따르면 2023년 국내 1인당 연간 커피소비량은 405잔에 달한다고 한다. 나 역시 직장에 다닐 때는 출근길에 한잔, 점심에 한잔해서 기본 두 잔은 마셨다. 물론 두 잔 모두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마셨다. 겨울이라고 아아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항상 내 손에는 아아가 들려있었다. 상황이 이랬기에 당연히 나도 내가 얼죽아인 줄 알았다. 그러나 퇴사를 하고 세계 여행을 시작하면서 깨달았다. 난 '선택형 얼죽아'가 아니라 '생존형 얼죽아'였다는 사실을.
유럽은 기본적으로 따듯한 커피를 많이 마시고 아예 따듯한 커피만 취급하는 곳들도 꽤 많다. 한국인들이 유럽 여행을 할 때 마음 편히 아아를 마실 수 있는 스타벅스를 반가워하는 이유다. 우리 역시 여행 초반에는 타의적으로 따듯한 커피를 먹어야 한다는 사실에 마음 한켠이 불편했지만, 한잔 두잔 먹다 보니 그런대로 먹을만했다. 아니, 꽤 좋았다. 왜 한국에서 따듯한 커피를 먹지 않았지? 싶을 정도로.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따듯한 커피를 시키고 있는 우리를 발견했고, 이에 대해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우리가 직장에 다닐 때 마시던 것은 커피가 아니라 카페인이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모든 직장인이 그렇듯 우리도 늘 피곤에 쩔어 있었고, 빠르게 카페인 충전을 할 수 있도록 쭉쭉 들이킬 수 있는 아아(그것도 샷이 추가된)가 필요했던 것이다.
한국에서 저가 커피가 인기 있는 이유는 아마도 여기서 비롯됐을 확률이 높다. 한국 직장인에게 커피의 맛은 후순위다. 그저 적은 돈으로 카페인을 충전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흠. 웃자고 글을 적기 시작했는데 어쩐지 글을 적으면 적을수록 슬퍼지는 이유는 뭘까.
이 글을 보고 있는 분들 중에서도 스스로를 얼죽아라 생각하는 분들이 많을 거라 생각한다. 이분들에게 제가 '감히' 따듯한 아메리카노 한잔을 권해본다. 단, 잠시 핸드폰을 내려놓고 억지로라도 마음의 여유를 가친 채 커피맛에 집중하셔야 한다. 우리가 적이라 생각했던 따아 녀석이 생각보다 괜찮은 놈이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