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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굴굴 Feb 04. 2024

막이 내린 뒤

처음 집회에 나간 건 열네 살 무렵이었다. 미국산 소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여론이 한창 들끓고 있었다. 언제 한 번 가 보지 않겠냐는 어머니의 물음에 흔쾌히 답했지만, 실은 무슨 일인 줄도 잘 모르면서 호기심에 냉큼 따라나섰다. 그날, 광장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렸다. 각종 단체 이름이 적힌 깃발들이 사방에 나부꼈고, 그 사이로 발언자들이 연단에 올라 마이크를 잡았다. 다들 어찌나 비장하던지. 외치는 구호도 부르는 노래도 몹시 힘이 넘쳤다. 이윽고 어머니 뒤를 쫓아 자리를 잡은 나는 그 모든 광경이 신기해 한참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옆에서 건네는 피켓을 받아 들고는 주변에서 하는 대로 눈치껏 따라 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도심 일대를 행진했다. 방금까지 앉아 있던 깔개를 접고서 엉덩이를 훌훌 털었다. 어느새 왕복 8차선 도로 위를 걸으며 박자에 맞춰 목소리를 높였다. 조금 어색한 기분에 긴장하기도 잠시, 그보다는 정말이지 역동적이고 생동감 넘친다고 생각했다. 어린 나는 집회를 일종의 놀이쯤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자동차도 아닌 내가 이토록 넓은 길을 누빌 수 있었다니. 마치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것처럼 묘한 흥분에 사로잡혔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는 어머니에게 내가 보고 들은 전부를 신이 나서 종알댔다. 얼마나 들떴으면 주말 농구반 수업에 가서까지 친구들을 모아 놓고 다음에 같이 가자 부추길 정도였다.


금기를 위반할 때 오는 쾌감이 있다. 차로를 침범한 순간 중요한 선을 하나 넘었다는 사실을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학교에서는 내가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배웠던 반면, 광장에서는 그걸 감히 어길 수도 있음을 온몸으로 익혔다. 그러고 보면 꼭 거창한 뜻을 가져야만 집회에 참석하는 것도 아니었다. 나의 경우, 반대에 가까웠다. 아무 기대 없이 맞닥뜨린 현장에서 낯선 세계를 경험했으므로. 오히려 그 세계가 궁금해 신문이나 책을 훑으면서 나름의 뜻을 세울 수 있었다. 어떤 집회에 나가든 도무지 익숙지 않은 장면이 잔상처럼 남았다. 내가 아직 모르는 현실, 그래서 더욱 이해하고 싶었던 그 목록이 자꾸만 길어져 갔다.


물론 모든 집회가 아름다웠던 것은 아니다. 세월호 참사가 있고 나서였다. 집회가 예정된 날이면 주요 길목마다 경찰 버스가 세워져 통행을 가로막았다. 그 미로 같은 차벽에 둘러싸여 나는 출구를 찾겠다고 숨을 헐떡이며 뛰어다니곤 했다.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하는데, 희미하게 들리는 함성에 애를 태웠다. 그런가 하면 최루액이 섞인 물대포를 맞은 적도 있었다. 삽시간에 얼굴이 매워져 하수구에다 콧물을 질질 흘렸다. 생수 한 통을 들이붓고는 얼마나 분통이 터지던지. 홀딱 젖은 채 지하철을 타야 했던 그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그만큼 나의 상식 밖에 있는 사회를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이따금 화도 나고 눈물도 났다.


그리고 그건 나란히 대열에 선 사람들 속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기꺼이 타인과 연대하려는 모습에 가슴이 부풀면서도, 서로의 차이에서 비롯된 불편과 고충 역시 꽤 있었다. 이를 테면 누군가 호응하기 어려운 주장을 펼친다든지, 불콰한 낯빛을 하고 거칠게 욕설을 뱉는다든지. 입장도 정서도 천차만별이라 함께할수록 그 간극은 도드라졌다. 하기야 내가 극복하고 싶은 문제가 집회에서라고 없을 리 만무했다. 때문에 얼마간 포용해야 한다고 믿는 편이었지만, 나중에 같은 현장에서 성추행 피해가 있었다는 소식 같은 걸 접하면 머릿속이 하얘졌다. 여전한 억압을 두고서 내가 느낀 해방감은 알량하게 쪼그라들었다.


몇 해 전, 대통령 탄핵을 요구하는 집회가 겨울 내내 이어졌다. 토요일 저녁마다 광장에 인접한 지하철역에서 사람들이 물밀듯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늘 무리에 휩쓸려 움직이다 말고 홀린 듯 멈춰 서서 그 스펙터클을 눈에 담았다. 웃음을 터뜨리거나 우수에 잠기거나 열변을 토하는 등 다양한 표정들이 두툼한 외투를 스쳐 지나갔다. 뉴스에서는 수십만의 숫자를 한 묶음으로 뭉뚱그려 보도했다. 하지만 저마다의 이야기로서 셈한다면, 그건 너무도 아득해 보였다. 다들 어떤 사연으로 집밖을 나섰을까. 막이 내린 뒤의 일상은 또 어떻게 변해 있을까. 집회가 끝나자 다시 도로 위로 자동차가 달렸고, 텅 빈 거리 너머로 각자의 내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비슷한 시기, 한 친구로부터 대뜸 그런 연락을 받았다. 집회에 가고 싶은데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그 말에 나는 동네 산책처럼 가볍게 다녀오기를 권했다. 사실 누구에게나 걸음마를 닮은 기억이 있다. 어설픈 게 마땅한 그런 시도를 통해 나 역시 한 뼘 자랐다. 만약 그 밖의 다른 고려를 더했더라면, 첫 발조차 내딛지 못했으리라. 그러니 일단 부딪히는 것만으로 의미가 있다고 믿는데, 한편으로는 조금 미련스레 돌아본다. 그래서 친구에게 그날의 경험은 무엇으로 각인되었을까. 단순한 해프닝에 불과했을까. 광장에서 품은 의문이 친구를 뒤흔들었기를, 지금도 어디선가 뜨겁게 불화하고 있기를 바라며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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