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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혁 Jul 11. 2016

가방을 만들다. 넷

떠다니는 가방의 무리


어느 해 보다 시린 겨울이 지났다. 2016년 3월 19일. 지평선을 오고가는 태양이 아직은 창백한 숨을 내쉬다 가는 어느 봄의 초입. 서울대 바로 앞 고시촌에 자리한, 3.3평의 작지만 창문이 커다랗고 볕과 바람이 잘드는 조그만한 방에서 서울살이가 시작되었다. 동생과 함께 살기에는 조금 좁지만, 서울 땅에 내 몸 한켠 뉘일 곳이 있다는 것만 해도 위안거리가 된다.

지난 5개월 동안 나의 가방은 SketchUp으로 그린 그림 한 장이 전부였다. 내가 잉태한 자식과 같은 놈이지만, 보고 있으면 묘하게 기분이 나빠지는 생김새를 가진 그 녀석은 솔직히 내가 봐도 쓰고 싶지 않았다.

결국 그동안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것과 다름 없었다. 허탈한 마음을 부여잡고 책상머리에 앉아 생각을 해본다. 내가 디자인 수업을 들은 적이 있었나? 있다. '화학 및 생물 제품디자인'. 미분방정식을 신나게 풀어대다가 조별과제에서 흘러내리지 않는 안경을 제안하여 프레젠테이션을 한 결과, 교수님의 '안타깝다. 대체 왜 그랬을까?'라는 짧은 탄식과 함께 장렬하게 최저점수인 B+를 남기고 간 비운의 과목. 괜히 아픈 기억만 떠올려 버렸다. 씁쓸한 입맛만 다시다가, 그냥 내가 여행 다니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이었는지 무작정 노트를 펼쳐 적어보기로 했다.


다시 펼쳐보니 이대로 가방을 만들지는 않은 것 같다.


세 시간의 고민 끝에 다이어리 두장을 채우고 나니 아침에 먹은 밥값을 한 듯 하여 기분이 상쾌하다. 여세를 몰아 시중에 나와 있는 것 중에 참고가 될만한 가방도 정리를 해본다. 그런데 무언가 부족하다. 남들은 여행 갈 때 어떻게 가방을 가지고 다니지? 이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데 다른 사람 신경 쓸 겨를이 있었겠냐마는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가방을 쓰는지 알아야했다. 방법은 어렵지 않았다. 이틀간 인천공항 지박령이 되는 것이다. 공항을 바삐 오가는 군중들이 떠다니는 가방의 무리로 보이기 시작할 즈음, 조금씩 떠나는 국가와 나이대마다 어떤 가방을 들고 다니는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관찰 결과는 모조리 기록해두었다.


대학을 졸업한 이래로 내 대뇌피질은 과연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가 의구심이 들 때가 가끔 있었지만 다행히 그것은 기우였다. 오랜만에 합리적인 이성이 지배하는 일련의 사고 과정을 거치고 나니 가방이 필요한 것은 세가지로 빠르게 압축되었다. 첫째로 짐을 쉽고 편하게 꺼낼 수 있어야 한다. 둘째는 자주 꺼내는 짐들은 별도로 수납 공간이 있으면 아주 좋다. 마지막으로, 안전해야한다.

시작한 지 일주일만에 내가 만들 가방의 가닥이 보이기 시작했다. 표현의 긍정이 과했던 것 같다. 그냥 가닥만 보였다. 상상력과 손재주가 빈곤한 나에게는 아직 가방을 그려야 하는 숙제가 남아있었다.






안녕하세요. 박인혁입니다. 왜 내가 원하는 여행 가방이 세상에 없을까 고민 하다가 다니던 회사를 작년 초 그만두고 가방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양천가방협동조합의 장인들께서 만들어주시는 제 가방, 첫번째 가방으로 두 번의 펀딩을 통해서 많은 분들과 만났습니다. 약 1,500 분의 소중한 고객님들께서 저의 시작을 함께 해주셨습니다. '가방을 만들다'는 그 첫발을 내딛기까지 제가 겪은 일들을 담아낸 이야기입니다.


마음에 드는 가방이 없어서 회사 때려치고 만든 여행 가방. 출시 반 년 만에 1,500명의 선택을 받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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