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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혁 Jul 13. 2016

가방을 만들다. 다섯

택배상자


그림에는 도무지 취미가 없다. 취미는 고사하고, 월트디즈니 인턴 첫 날 미키마우스를 그려보라 하시며 OT 중에 네주신 종이 위 마치 절대반지를 찾아 모르도르를 헤매다 살아 돌아온 듯 한 미친 쥐 한마리를 연성했을 만큼 그 재능과 흥미 측면에 있어서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낙제생다. 그런데 종이 위에 대고도 못 따라 그릴 것 같은 가방을, 아니 세상에 있지도 않아서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가방을 나는 그려내야 했다. 물은 답을 몰라도 구글은 답을 알고 있겠지. 'backpack sketch'라고 검색어를 넣어본다.


미키마우스도 버거운데, 못 볼 것을 본 듯한 기분이다.


괜히 검색했다. 깔끔하게 가방은 집어치우고 구직 전선에 다시 뛰어들어야 하나 걱정과 한숨이 나오기 시작했다. 물론 월세 계약이 11개월이나 남아있었기에 그 생각이 오래가지는 않았지만.

정신일도 하사불성. 의자에 가만히 앉아 온 몸의 시냅스를 쥐어짜내기 시작한다. '구글에서 검색한 가방처럼 그리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동그라미는 콤파스가 있으니 어떻게든 그려보겠는데 곡선은 불가능하다. 그래도 직선은 자 대고 그리면 되겠지. 원래 네모난 가방을 만들려고 했으니깐 자랑 연필만 있으면 가방의 형태를 한 무언가는 그려볼 수 있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시작하자.'

그렇게 며칠간 가방만 주야장천 그려댔다. 두부를 잘라놓은 것 처럼 반듯하게 통일된 직육면체의 몸체를 먼저 그리고, 뚜껑을 어디로 만들지, 주머니는 어디에 어떻게 만들지, 이런 저런 고민을 하며 열 개 남짓한 가방을 그렸다. 그리고 후보는 두개로 압축되었다.


이대로 나왔으면 큰일날 뻔 했다.


당시의 가방에서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은 분리형 칸막이 하나 뿐, 아마도 실제로 생산까지 했다면 침체한 봉제 업계에 소소한 적선을 하는 꼴이 될 뻔 했을 것 같은 위의 가방들 중에서 오른쪽 가방에 나는 한동안 집착하였다. 실제로 만들어지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는데, 상경하면서 짐을 바리바리 담았던 택배상자가 무척이나 유용하였다.


덕분에 서울살이를 끝내고 내려갈 때 쓰려고 쟁여둔 택배상자는 전부 가방 모형이 되었다.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하지 않았다면 아마 그대로 샘플까지 직행 했으리라. 택배상자를 대충 얹어서 만든 가방의 모형은 무언가 매우 임팩트가 부족했다. 아니 아무런 임팩트가 없었다. 디자인은 없다고 보아도 무방했던 터라, 기능적으로 극단적으로 특화된 가방이 되어야 했다. 그런데 기껏 생각해냈다고 하는 기능들이, 내가 봐도 도저히 매력적이지 않았다. 내가 잘 모른다는 것이 어설픔의 변명거리가 될 수는 없었다. 며칠이 걸릴지 몰라도 제대로 된 가방을 만들어 내야했다.



드디어 무언가 그럴듯 해 보인다.


세상에는 안되는게 분명히 있다. 다행히 나에게 가방은 '안되는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가방을 위한 여정은 동대문으로 이어졌다.






안녕하세요. 박인혁입니다. 왜 내가 원하는 여행 가방이 세상에 없을까 고민 하다가 다니던 회사를 작년 초 그만두고 가방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양천가방협동조합의 장인들께서 만들어주시는 제 가방, 첫번째 가방으로 두 번의 펀딩을 통해서 많은 분들과 만났습니다. 약 1,500 분의 소중한 고객님들께서 저의 시작을 함께 해주셨습니다. '가방을 만들다'는 그 첫발을 내딛기까지 제가 겪은 일들을 담아낸 이야기입니다.


마음에 드는 가방이 없어서 회사 때려치고 만든 여행 가방. 출시 반 년 만에 1,500명의 선택을 받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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