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러 멀리 돌아가기의 미학
이번 북규슈 기차여행의 하이라이트. 테마기차 후타츠보시 4047을 타는 날이다.
후타츠보시는 일본어로 두 개의 별이라는 뜻이다. 4047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이 열차는 나가사키와 타게오 온센 역을 이어주는 테마열차고 2022년에 처음 운행을 시작했다고 한다. 흰색과 금색을 메인 컬러로 외관이 꾸며져 있는, 마치 세일러복을 연상케 하는 세련된 열차다.
나가사키에서 타케오 온센까지는 기차라면 보통 신칸센으로 이동한다. 즉 효율적으로 이동하면 총 40분이 소요된다. 후츠타보시는 이 거리를 돌아 돌아 2시간 반동안 간다. 유유자적 일부러 이 근방 예쁜 곳들을 이곳저곳 둘러보며 돌아가는 열차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상행(나가사키 -> 타케오 온센) 때 볼 수 있는 풍경과 하행(타케오 온센 -> 나가사키) 때 볼 수 있는 풍경이 달라서 색다른 맛이 있다. 2번 타야 할 이유가 생겼다는 것이지
지난번에 설명했듯이 이게 테마열차다 보니 운행하는 날짜는 정해져 있다. 2024년 4월 기준으론 아래와 같았고 나는 운이 좋게도 금요일이라 탑승할 수 있었다. 보면 주기적으로 금토일월을 운행하는 것 같다. 아마 평일에는 테마열차 타고 한가하게 놀러 다니는 사람이 많이 없을 테니까.
운행하는 날이면 하루에 상행과 하행 각각 1회씩만 운행하고 시간표는 아래와 같다. 이 시간표는 바뀔 수도 있으니 꼭 공식 홈페이지를 참고하는 게 좋다. 하루에 한 번뿐인 기회 놓치면 너무 아쉬울 거니까
나가사키를 떠나는 날이 밝았다.
원폭박물관과 평화 공원을 둘러보고 기차 터미널로 왔다. 이 날은 후쿠오카에 사는 친구집에서 하루 신세 지기로 해서 선물로 나가사키의 명물인 카스텔라를 구매하고 기다리고 맥도널드에서 커피 한 잔 하면서 있었다. 날씨도 화창한 게 기차여행 하기에 딱이었다.
그러고 나서는 기차 지정석 예약을 하러 갔다.
후츠타보시를 타기 위해서는 지정석 예약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여기 도착해서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역무원에게 이 기차 타고 싶다고 말하니까 티켓은 어딨냐길래 내 레일패스를 보여주니 이것만으론 안되고 지정석을 따로 끊어오라고 했다.
이건 신칸센이나 불릿 트레인처럼 자동판매기에서 하는 게 아니라 티켓 창구에서 대면으로 구할 수 있다. 당연하게도 너무 늦는 바람에 좋은 자리는 구하지 못하고 통로 쪽 좌석을 받았다.
외관 찍으려고 플랫폼에 미리 도착해 있었는데 때마침 기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카탈로그에서 봤던 것하고 크게 다르지 않은 외관이지만 직접 보니 별 두 개로 브랜딩 되어 금색 띠를 곳곳에 두른 세련된 열차가 들어왔다.
일본 열차 덕후들이 왜 열차 사진 찍는지 알게 되는 모습이었다. 나는 똥손이라 사진을 잘 못 찍었긴 하지만 빛 잘 받는 곳에서 예쁘게 찍으면 정말 이쁘겠더라.
기차에 탑승하면 외관과는 전혀 다른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를 볼 수 있다. 아래와 같이 두 종류의 좌석이 존재하고, 소파좌석의 경우 계속 창밖을 보면서 갈 수 있는 좌석이다. 박스 시트는 우리가 아는 그 기차 형태다. 뒤의자를 돌릴 수 있게 해서 일반 열차처럼도 가고 4명이서 마주 보고 갈 수도 있는 그런 좌석이다.
실제로 타서 보면 더 고급스럽다. 나무의 질도 그렇고 조명도 너무 잘 어울려서 고급스러운 느낌이 물씬 났다.
기차가 출발하면 예쁜 곳들만 골라서 운행한다. 속도도 빠르지 않아서 천천히 풍경을 둘러보며 갈 수 있다. 바다가 보이는 경우도 있고, 산이 보이는 경우도 있다. 아쉬웠던 점은 내가 탔던 오른쪽 창문에는 주로 산과 나무가 많이 보였고, 왼쪽 좌석에서는 바다가 주로 보였다는 점이다. 공식 홍보사진인 아래 사진을 보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간중간에 예쁜 곳들엔 정차도 해주고 느리게 운행하기도 해서 바다도 충분히 즐길 수 있었다.
중간에 있는 라운지에서 아래 수기로 작성해서 복사한 운행도를 얻을 수 있었는데, 상행과 하행을 나눠서 표기했다. 몇 시쯤 어디에 도착하는지, 그곳이 어떤 아름다움이 있는지, 정차하는 역은 어딘지를 소개하고 있다. 그림만 봐도 귤이 유명한 기차역, 사케가 유명한 곳 등 정보를 일본 스럽게 얻을 수 있었다.
라운지 칸은 정말 펍처럼 꾸며놨는데, 여러 음료나 술을 팔고 소파 좌석 등을 만들어놨다. 자유석처럼 이용하면 돼서 나처럼 자리를 잘못 잡은 사람들이 와서 최고의 풍경을 즐기며 술 한잔 하며 쉴 수 있다.
실제로 저 소파에 앉아서 보면 이런 느낌이다.
이렇게 분위기로 판을 깔아주는데 술을 안 마실 수 없지
3량 중 두 번째 칸이 라운지라 여기에 사진에서 보는 것과 같은 펍이 있다. 나가사키를 비롯해 이 열차가 지나가는 지역의 특산품이나 그 지역에서만 만들어지는 술을 판다.
나는 냥코 캬마보코(고양이 어묵)이랑 나가사키 특산 샤케를 잔술로 주문했다. 가격이 그렇게 비싸지도 않고 맛도 좋아서 너무 만족스러웠다. 샤케는 잔을 받아 들고 샤케 자판기에서 내려마시는 방식인데, 버튼 하나 누르면 한 잔만큼만 쪼르륵 나온다.
이 열차를 타며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열차문화에 대해 경험했다고 생각한다. 일본인들은 생각보다 열차에 진심이고, 기차역에 들이는 공이 크다는 점도 배웠다. SNS로 들었던 내용과는 사뭇 달랐던 게, 나는 왜 이렇게 마이너 한 취미에 열광할까라고 생각했는데 경험해 보니 너무 만족스럽고 좋았다. 우리나라에도 (과하지 않게) 도입되었으면 좋겠다.
특정 기차에, 기차역에 스토리를 입히고(감귤역이 인상적이었음) 좋은 풍경을 가진 기차역에서 캠페인을 벌인다. 예쁘고 특색 있는 기차는 모형을 만들어서 굿즈로도 판매한다. 아래 사진 중 가운데 사람들은 후츠타보시의 정차역 중 하나인 오무라라는 지역을 홍보하러 나오신 분들이다. 나는 오무라에 대해 1도 관심이 없었지만 저분들의 홍보로 벚꽃이 유명하고 땅콩이 많이 나오는 지역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에너지 넘치는 특정 기차와 특정 기차역을 홍보하는 사람들. 만나서 너무 좋았다.
이건 뭐 100장의 사진을 보여줘도 알기 힘들다. 그저 이 열차가 여러 산과 바다를 지나며 달린다는 점 정도만 전달할 뿐. 나는 개인적으로 오무라만 근처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잔잔한 바다와 이 열차가 잘 어울린다. 오무라 만 근처 역에서 정차해 주는데 이때 사진을 마구 찍을 수 있다.
일본 최대의 테마파크인 하우스텐보스에서도 정차한다. 멀리서 봐서 그런가 그냥 영국 건물처럼 보이지만 이 일대가 엄청나게 큰 놀이공원이라고 한다. 하우스텐보스라는 열차가 따로 있어서 여기까지 상시 운행할 정도다.
내가 지나간 이 근처는 그 자체로 조경과 다리, 건물로도 충분히 예뻤다.
두 시간 반동안 보면 질릴 법도 한데 질리지 않는 풍경의 연속이다. 탁 트이다가도 조밀조밀한 곳도 있고 바다도 있고 산과 나무, 꽃도 보인다. 애초에 큰 건물이 하나도 없다는 점에서 나는 쭉 합격점을 주고 싶다.
30분 거리인 목적지를 일부러 돌아 돌아 2시간 30분을 갈 이유가 있나?
바보 같은 질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산술적으론 후자를 선택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현대인에게는 더욱이 그렇다. 그 와중에 후자를 선택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후츠타보시 같은 일본의 테마열차들이 알려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때때로 후자를 선택해야 한다. 혹자는 멈출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하는데, 나는 돌아간다고 표현한다. 돌아가야만 보이는 것들이 꽤 있다. 물론 마냥 돌아가기만 하면 지루하고 성취감이 없을 수 있다. 하지만 한번쯤 돌아가보는 경험을 해보고, 장점을 느껴봤으면 좋겠다. 이번 경험은 문제를 느슨하게 푸는 방법론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