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기 4. 한적함 속에서 하루를 보내요
오늘은 금요일이에요.
보통의 금요일이라면 주말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혹시나 발생할 야근이라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해 떠있을 때 사력을 다하는 날이죠. 심지어 오늘처럼 비가 쏟아지는 날이면 비 오는 금요일 강남 퇴근길이 기다리고 있으니, 벌써부터 힘이 빠집니다. 근데 백수가 되니 이게 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오늘은 늦잠이긴 하지만 기분 좋게 일어났어요. 자고 일어났는데 피곤하지 않은 느낌 있잖아요. 기지개 한 번만 켜면 바로 활동할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그런 느낌이요. 어제는 와르르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잠들었는데, 아침엔 비가 별로 안 왔어요. 바로 헬스장에 갔다 와서 씻고 아침을 먹은 다음 하루를 시작했어요.
곧바로 책상에 앉아 제 노동요인 메이플 브금 피아노버전 3시간짜리를 틀어놓고 커피를 마시면서 회복탄력성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방해금지모드로 알림을 차단한 다음 온전히 집중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때쯤 다시 제가 좋아하는 빗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해서 계속 히죽히죽 웃음이 났어요.
1시쯤 되었는데도 배가 고프지 않았어요. 그래서 점심은 안 먹었습니다. 원래 시간이 되면 나중을 위해서라도 점심을 먹어뒀을 텐데 시간이 제 손아귀에 들어오니 이런 사소한 자유를 누릴 수 있음에 감사했습니다. 당연한 것인데 감사하는 저를 다시 생각해 보니 회사에 저를 너무 심하게 맞추고 있지 않았나 생각하게 됩니다.
밥은 안 먹었지만 커피는 마시고 싶어서 카페를 갑니다. 스타벅스나 커피빈 같은 프랜차이즈 카페가 즐비한 동네지만 원룸촌 구석에 자리 잡은 1층짜리 카페로 가요. 사람이 없는 게 첫 번째 조건입니다. 지금 시간대면 직장인들이 없지만 대학생들이 있어서 프랜차이즈 카페엔 사람이 많고, 공부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이런 동네카페엔 사람도 없고 공부하는 카페도 아니어서 적당한 백색소음을 즐기기 좋습니다.
커다란 통창 옆에 있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아요. 비가 이따금씩 입장을 바꾸는데, 창에 부딪히는 소리와 질감으로 알 수 있어요. 어떤 때는 소곤소곤 내렸다가 갑자기는 불같이 버럭버럭 내렸다가 하는데, 뽀송뽀송한 상태로 보는 입장에서 경험하니 이것마저 재미가 있습니다. 구름이 이동하는지 빛 커튼이 걷혔다 덮였다 하는 것도 느껴집니다.
카페 내부에는 커피 볶는 향이 진동을 해요. 가끔 탄내도 났다가 고소한 향이 그윽해질 때도 있고요. 동네 카페이다 보니 가끔 아줌마 아저씨들이 와서 요란한 목소리를 뽐내기도 하고, 창밖에 목줄 풀린 개가 짖어대기도 했는데 그리 방해되지 않았어요. 되이려 헛웃음이 나기도 해요.
금요일 오후, 당장 지난주만 했어도 가장 치열했을 시간에 비의 질감을 느낄 수 있다니 축복이 아닐 수 없어요. 아마 장대비가 회사 창문을 때리는 리듬을 느끼며 퇴근길에 겪을 모험에 기운이 빠졌을 텐데, 이런 호사가 현실인지 궁금해지네요.
오늘 읽은 회복탄력성이라는 책에는 이런 말이 나와요.
어떤 일이 “기분 좋은 일” 혹은 “나쁜 일“, ”화나는 일“, ”짜증 나는 일“이 되려면 반드시 나의 해석이 들어가야 한다.
오늘의 경험들이 지난주 금요일에, 혹은 지지난주 금요일에 발생했어도 같은 감정을 느꼈을까요? 사람의 마음가짐이나 가치관, 환경 등이 현재의 상황을 평가하고 해석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주는데, 저는 긍정적인 방향에서 큰 영향을 받고 있음을 깊이 느끼고 있어요. 그리고 이런 나의 해석이 같은 시간을 사용한 경험이어도 굉장히 밀도 있는 경험으로 만들고, 비슷한 밀도의 경험은 비슷한 경험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과 연관되어 있을 것입니다.
퇴사를 하니 세상이 예뻐 보이는지, 최근에 겪은 경험들로 내가 환골탈태하게 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할수록 좋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최근에 예술을 하는 친구 한 명이 소개팅으로 만난 지 3일 만에 청혼을 하고 1달 만에 결혼을 했습니다. 청첩장을 받으며 이렇게 현실적인 부분을 하나도 생각하지 않을 수 있나 싶었는데, 어쩌면 그 친구와 와이프 되실 분은 그 상황에서 좋은 점과 밝은 면을 위주로 생각했겠구나 싶었어요. 긍정적인 부분만 생각해도 생각할게 많아서 머리가 지끈 할 텐데 말이에요.
언제나 행복한 일, 기분 좋은 일로 바라볼 수 없다는 건 알지만, 어떤 일에 최대한 밝은 의미를 부여하고 좋은 해석을 해보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