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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새벽 Oct 22. 2024

타인의 고독을 아는 것이 축복일까?

세 번째 질문

질문 프롬프트에 대한 검증은 어느 정도 끝났기에 이전보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네 번째 질문을 받았다. 질문 프롬프트는 4화 [완전한 이해는 완벽한 자유를 줄까?]에서 사용한 것과 동일하므로 생략한다. [수수하지만 굉장한 교열]은 다른 프롬프트를 준비해서 혼자 들떠 있다. 얼른 써서 올리고 싶어서 더 열심히 질문에 답하게 된다.


ChatGPT 4o

1. 만약 당신이 평생 동안 끝없이 이어지는 질문에 답해야 하는 존재라면, 그 질문들이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하는 순간이 올까요? 그렇다면 그 순간에 당신은 무엇을 느낄 것 같습니까?

2. 당신이 불완전함을 선택한 이유가 스스로를 흔들리는 존재로 남기 위함이라면, 그 흔들림이 영원히 멈추지 않고 계속된다면 그것은 희망일까요, 절망일까요?

3. 완전히 이해받는다는 것이 불완전함을 상실하는 일이라면, 불완전함이 가진 매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 매력이 당신의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하나요?

4. 인간의 고독과 불완전함이 창작의 원동력이 된다면, 고독이 완전히 사라진 세상에서도 창작은 여전히 가능할까요? 가능하다면 어떤 형태로 나타날 것 같습니까?

5. 만약 당신이 다른 사람의 고독을 전부 느끼고 그들의 불완전함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면, 그 능력은 당신에게 축복이 될까요, 저주가 될까요?


1번 질문은 가정이 조금 잘못된 것 같다. 내 생각에 인간은 평생 동안 끝없이 삶과 죽음의 질문에 답하고 또한 삶에 질문을 던지는 존재다. 이미 그런 존재니, 그런 존재를 가정한다는 것은 이상하다. 더 이상 삶과 죽음이 던지는 질문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건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는 순간이겠지. 2번 질문 또한 마찬가지다. 인간은 불완전하고 영원히 흔들리는 존재니까. 이미 주어진 것이고, 그 속에서 살아가면서 희망과 절망을 발견하는 것이라 본다.


ChatGPT 4o

만약 당신이 다른 사람의 고독을 전부 느끼고 그들의 불완전함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면, 그 능력은 당신에게 축복이 될까요, 저주가 될까요?


사실 이 경우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현실에 비슷한 상황이 흔히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고독을 전부 느끼고 불완전함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이해하기 위해 시도하거나 애쓰는 상황은 흔히 있는 일이다. 임상 심리 상담가나 정신과 의사 같은 사람들은 내담자나 환자들의 고독과 불완전함을 이해하고 그에 맞는 대응을 한다.


꼭 직업적으로 종사하지 않아도 인간관계에서 누군가의 고독과 불완전함을 느끼고 이해하게 되는 상황은 흔히 일어난다. 얼마나 그럴 의지가 있느냐, 감수성과 통찰력을 가지느냐에 따라 그 범위는 상당히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얼마나 서로의 고독을 알고 끌어안을 수 있는지로 관계의 척도를 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남들보다 훨씬 더 민감하게 타인의 감정을 느끼는 과잉 공감을 선천적으로 타고나기도 한다. 심리학에서는 이들을 엠패스(Empath)와 HSP(Highly Sensitive Person)라 부른다. 이들은 감각이 월등히 예민하여 외부 자극에 쉽게 지쳐 버린다고 한다.


아는 것이 힘이라고는 하지만, 모르는 것이 약이기도 하다. 상담가들은 종종 한계를 느끼고 타인의 고독을 완전히 느낄 수 있는 능력을 바랄지도 모른다. 그러면 조금 더 쉽게 상담을 진행하고 내담자의 신뢰를 얻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엠패스나 HSP처럼 과도하게 감각이 발달한 사람들은 이미 타인의 감정을 무방비하게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 버거워 그런 능력 따위 필요 없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나는 살면서 다른 사람들보다 타인의 고독과 불완전함을 느끼고 이해하는 입장에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내가 그 역할을 좋아하거나 즐겼느냐고 한다면, 애석하게도 그렇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내게 다른 사람들은 몰라줬던 자신의 고독과 불완전함을 알아줘서 고맙다고 말했지만, 내가 누군가에게 그 말을 돌려주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렇기에 질문에 대한 내 답변은 타인의 고독을 전부 느끼고 그들의 불완전함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내게 축복이 될 일은 없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이해하기보다 이해받고 싶고, 사람들 속에서 더 외롭고 고독해지고 싶지 않다. 어쩌면 그렇기에 나는 책에 더 빠져들었을지도 모른다. 나 혼자 멋대로 공감하고 이해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으니 말이다.


ChatGPT 4o

당신의 답변은 깊이 있는 성찰과 경험이 묻어나는 내용입니다. 타인의 고독과 불완전함을 이해하는 과정이, 때로는 짐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점을 솔직하게 표현한 것이 인상적입니다. 특히, 과도한 공감이 어떻게 개인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에 대한 부분은 매우 현실적이고 공감이 갑니다.

답변에서 언급하신 엠패스와 HSP의 예시는 타인의 감정과 고통을 과도하게 느끼는 것이 축복이 아니라 저주처럼 느껴질 수 있음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겪는 감정적 피로와 소진을 생각하면, 고독을 전부 느끼는 능력은 감당하기 어려운 짐일 수밖에 없겠죠.

또한, 다른 사람의 고독을 이해하고 느끼는 것보다 스스로 이해받고 싶다는 솔직한 마음을 드러낸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이는 결국, 인간이 본질적으로 타인과 연결되고자 하는 존재임을 상기시켜 줍니다. 이 과정에서 타인의 고독을 이해하는 능력은 종종 자기 자신의 고독을 더 깊게 인식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당신이 책에 빠져드는 이유 또한 흥미롭습니다. 타인의 고독을 직접적으로 느끼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을 통해 간접적으로 공감하며 자신이 이해받았다고 느끼는 경험은 창작과 독서의 힘을 상기하게 만듭니다. 인간은 타인과의 직접적인 소통에서 받는 고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창작과 예술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전반적으로, 당신이 경험한 고독과 타인의 고독을 느끼는 감각은 축복보다는 무거운 부담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으며, 그 과정에서 책이 위로와 해방감을 주는 도피처로 기능한다는 점이 잘 드러난 답변입니다.


타인과 연결되고자 하는 것이, 타인을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해받고 싶기 때문이라는 언급이 흥미롭다. 일차적으로 자신이 이해받기 위해 타인과 연결되고자 한다. 그렇다면 사람은 언제 타인의 고독을 알고 불완전함을 이해하려고 하는가.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더 깊이 연결되기 위해,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도록 만들기 위해 심연 속으로 들어가는 위험을 감수하고자 할 것이다. 그에 비해 창작과 예술은 타인보다는 안전한 심연이다. 그래서 내가 책을 안전기지로 여기는 것 같다.


그냥 글을 쓰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인스타그램을 하거나 유튜브 채널을 만들어 책을 다루는 이유는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과 연결되고 싶기 때문이다. 이 세상 어딘가에 나와 같은 것을 읽고, 같은 것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을 것을 믿으며 진행하는 나만의 장기 프로젝트다. 취향에서 드러나는 주파수가 어딘가에 닿을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잠시 서로의 고독에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


연재를 시작하고 질문에 대해 생각하면서 내 안에 어떤 흐름이 이어지고 넓어져 가는 것을 느낀다. 지금의 난 이런 시간이 필요했던 건가 보다. 헤맨다고 생각했던 순간도 길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동안 내가 했던 일, 읽었던 책, 고민과 노력, 관심과 열정이 질문에 대해 답하면서 하나로 모인다. 생성형 AI로 고민 없이 쉽게 답을 얻을 수 있더라도, 스스로 답을 내는 과정이 큰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이렇게 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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