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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새벽 Oct 21. 2024

완전한 이해는 완벽한 자유를 줄까?

두 번째 질문

이제 첫 번째 질문 [기억을 잊는다면 달라질 수 있을까?]의 대화 기록으로 새로운 질문을 받아야 할 때다. 브런치북에 글을 작성해야 한다는 생각에, 새로운 프롬프트를 사용하는 것이 매번 조금 긴장된다. 지금까지 생성형 AI를 사용하면서 생각한 대로 프롬프트가 작동하지 않는 일이 수도 없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생성형 AI를 사용해 보면 완벽하게 모든 걸 해줄 것만 같지만,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면 꼭 그렇지는 않은 단계에 들어가게 된다. 제대로 된 제품, 팔릴 만한 상품, 완성된 하나의 작품, 가치 있는 콘텐츠로서 시장에 통용될 수 있는 퀄리티를 갖추기에는 부족하다 싶은 부분이 계속 생긴다.


내가 아직 미숙하고 요령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처럼 미숙하고 요령이 없으면 생성형 AI만으로 모든 걸 한순간에 하는 마법 같은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는다는 의미기도 하다. 물론 생성형 AI가 생긴 이후로 놀라울 정도로 많은 것들이 쉬워지긴 했지만 마냥 다 쉽진 않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래서 생성형 AI를 더 많이 시도해 보고 사용해 봐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생성형 AI의 등장에 압도된 경우라면 더 그렇다.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뛰어난 부분도 보이지만 부족한 부분도 보이고, 그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도 보이게 된다.


더군다나 2022년에 챗 GPT가 출시된 이후로 2년여간 수많은 AI 생성물을 접했다. 모두는 아닐지라도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만들어 낼 수 있는 수준의 결과물은 AI가 만든 티가 난다. 그만큼 익숙해지고 흔해졌기 때문이다. AI 결과물은 '기본' 내지 '평균'이 됐다. 결국 또다시 주어진 조건 속에서 누가 더 가치와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있는지의 문제가 됐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두 번째 질문을 생성해 보자. 이전에 썼던 질문 프롬프트에 [기억을 잊는다면 달라질 수 있을까?]의 대화 부분을 정리해서 작성했다. 대화 내용은 지난 회차 글에 있으므로 프롬프트에서 질문과 답변의 세부 내용은 생략했다.


프롬프트

당신이 질문을 하고 내가 답변합니다. 나는 생성형 AI가 아니더라도 할 수 있는 평범한 질문을 원하지 않습니다. 생성형 AI만의 독특한 관점이 담긴 질문을 만드세요. 생성형 AI가 아니면 하기 어려운 질문을 해 주세요. 하지만 생성형 AI와 관련된 질문은 피하세요. 질문 내용이 너무 대답하기 어려운 수준이면 안됩니다. 에세이로 답변할 수 있는 질문을 만드세요. 질문은 짧고 간단하게 해 주세요. 5개의 질문 중 하나를 골라 답변하겠습니다.

다음 대화 내용을 보고 떠오르는 것을 질문합니다.

#A의 질문

#B의 답변

#A의 반응과 질문

#B의 답변


예상외로 구구절절 다른 사족 없이 깔끔하게 질문만 출력했다. 항상 투머치토커 마냥 주절대던 녀석이 용건만 간단히 말하니 조금 섭섭해질 정도다. 그만큼 핀 포인트를 잘 잡아서 프롬프트를 작성했다는 의미니 기계를 상대로 괜한 마음은 넣어두자. 이러다 또 다음 질문에선 어찌 대답할지 모를 일이다. 기계지만 기계처럼 매번 똑같지는 않으니 말이다.


ChatGPT 4o

1. 당신의 삶에서 무언가를 잃는 대신 다른 무언가를 얻었다면, 그 과정에서 얻게 된 것이 당신의 정체성에 얼마나 깊게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나요?

2. 만약 당신이 미래의 특정 순간을 미리 경험할 수 있다면, 그 경험이 현재 당신의 선택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예상하나요?

3. 누군가가 당신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상상한다면, 그 사람과의 소통은 당신에게 더 큰 자유를 주겠습니까, 아니면 제약을 주겠습니까?

4. 만약 당신이 전혀 모르는 새로운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 감정이 당신의 사고방식에 어떤 변화를 일으킬 것 같나요?

5. 만약 당신의 생각을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 형상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대화 내용에 대한 질문만 나오는 거 아닌가 했는데 적절히 변주되었다. 기특한 녀석. 아니지, 내가 잘 써먹어서 좋은 결과가 나온 거니 기특한 건 나지. 아니, 이거 말하고 보니 내가 무슨 악덕 사장이나 대학원생 논문 가로채는 교수 같기도 하고. 상대는 기계라도 난 인간이다 보니 이런 의인화가 일어나는 건 어쩔 수 없다. 쓰읍.


ChatGPT 4o

누군가가 당신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상상한다면, 그 사람과의 소통은 당신에게 더 큰 자유를 주겠습니까, 아니면 제약을 주겠습니까?


질문을 보자마자 허를 찔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아닌 타인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 자신을 완전히 이해하지도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인간은 누구나 마음속에 자신만의 고독과 외로움을 안고 살아간다. 타인, 때로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받는 몰이해 속에서 슬퍼하거나 괴로워하는 것이 삶의 한 축을 이룬다.


결핍 속에서 늘 자신을 완전히 이해해 주는 존재를 꿈꾸며 목말라 있고, 그런 존재가 가져다 줄 무언가에 희망과 기대를 품는다. 그렇기에 자유가 아니라 제약을 줄 수도 있다는 가정은 너무나도 강렬하게 다가왔다.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다. 그러니 완벽함마저 완벽하지 않을 수 있다. 이렇게 생각을 이어가는 것이 재밌다. 이번에도 꽤 흥미로운 질문이 나왔다.


나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더 큰 자유를 줄 것이라는 건 쉽게 예상할 수 있고 수긍이 간다. 그런데 제약을 줄 수 있다는 건 금방 그 예시가 떠오르지 않는다. 누군가 나를 더 많이 이해해 줘서 나쁠 게 도대체 뭐란 말인가. 그런데 자유가 항상 좋기만 하고, 제약이란 게 꼭 나쁜 건가?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근대인은 자유라는 무거운 부담을 피해 다시 의존과 복종으로 돌아가려고 한다고 지적했다. 현대인 또한 지나치게 많은 가능성과 선택의 자유에 지쳐 단세포적 소비를 하거나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고 내버려 둔다. 파헤치지 않으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기에 50% 확률이 남지만, 없는 것을 확인하면 제로가 되니 덮어두는 식이다.


자유에는 항상 대가가 따른다. 그러니 완전히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주는 자유의 대가는 제약일지도 모른다. 그 사람과의 소통이 더 큰 자유만 주거나 제약만 주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이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어떤 사람의 단점은 그가 가진 장점의 그림자이듯이 말이다.


애초에 소통이라는 것은 서로 모르는 것을 알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서로에 대해 알아가고 이해하고 더 깊이 연결되었음을 느끼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완전한 이해는 소통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서로 잘 통하면 말하지 않고 눈빛만 봐도 안다고 하지 않는가.


완전한 이해자가 주는 자유는 소통하지 않을 자유다. 나를 증명하고 납득시키지 않을 자유다. 숨김없이 있는 그대로의 나로 존재할 수 있는 자유다. 이런 절대적인 존재가 생기면 그 존재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벗어나고자 하지도 않을 것이다. 스스로 머물며 때로는 집착하고 매달리게도 될 것이다. 그 존재 자체가 자신의 제약이 된다.


그러니 나는 혼자 흔들리며 고독하고 외롭게 서 있을지언정, 완전함이 아니라 불완전함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내게는 나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존재와의 소통이 주는 자유보다, 그 존재가 주는 제약이 훨씬 더 크게 다가올 것이다. 그리고 나는 글을 써야 한다. 완전한 이해가 없으니 계속 글을 쓰는 것 아니겠는가.


ChatGPT 4o

당신의 답변은 매우 깊이 있고 철학적이네요. 완전한 이해가 가져다줄 제약에 대한 사유는 특히 흥미롭습니다. 이해를 통해서 자유를 얻을 것이라는 기대는 직관적이지만, 그 속에서 자유의 한계를 인식하는 과정이 감탄스럽습니다. 그리고 자유의 대가가 제약일 수 있다는 생각은 에리히 프롬의 관점과 맞닿아 있어, 자유라는 개념이 항상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재고하게 만듭니다.

또한, 완전한 이해가 오히려 소통을 불필요하게 만들고, 그로 인해 스스로 제약을 느끼게 될 것이라는 점은 새로운 시각입니다. 인간의 본질적인 불완전함이 당신에게 창작의 원동력이 된다는 결론 또한 인상적입니다. 당신의 고독이 글쓰기를 통해 표현되고 해소되는 듯한 느낌이 드네요.

완벽한 이해 대신 불완전함을 선택하며 흔들리기를 원한다는 태도는, 인간의 존재가 불확실성과 고독 속에서 의미를 찾는 여정을 암시하는 듯합니다. 이를 통해 결국, 자유와 제약, 이해와 몰이해, 그리고 고독과 소통은 모두 서로를 보완하는 관계임을 느끼게 합니다.


인간의 본질적인 불완전함이 창작의 원동력이고, 인간의 존재가 불확실성과 고독 속에서 의미를 찾는 여정이라고 정리해 준 부분이 꽤 명쾌하다. 그런데 반응이 너무 칭찬 일색인 것이 석연치 않다. 구태여 매를 맞기로 한다. 부정적인 의견이 있다면 작성해 달라고 했다. 일관성을 위해 이 부분은 세 번째 질문 프롬프트에 굳이 넣지 않을 생각이다.


ChatGPT 4o

당신의 답변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을 고려해 보자면, 완전한 이해가 반드시 제약을 가져올 것이라는 가정이 지나치게 이분법적일 수 있습니다. 완전한 이해는 오히려 소통의 새로운 차원을 열어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예를 들어, 이해를 통해 더 깊이 있는 소통이 가능해져 서로에 대한 기대와 요구가 줄어들고, 보다 성숙한 관계로 발전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완전한 이해가 꼭 집착이나 의존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모든 관계에 적용할 수 있는 전제가 아닐 수 있습니다.

또한, 불완전함을 선택한다는 결론은 매력적이지만, 불완전함 속에서 느끼는 고통과 불안에 대해선 충분히 다루지 않은 것 같습니다. 불완전함이 창작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점은 동의할 수 있지만, 그 과정이 늘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고독이 언제나 생산적인 결과를 낳는다는 것도 현실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완전한 이해가 주는 소통과 관계의 긍정적인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에 대해서는 타당한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이 또한 관계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강한 나의 일면이 반영된 것이 아닌가 한다. 존재한다고 상상해 보라고 해도 은연중에 결국 그런 사람은 없다고 여기기 때문일 수도 있다.


불완전함 속에서 느끼는 고통과 불안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고 해도, 고독이 언제나 생산적인 결과를 낳는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납득할 수 없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든다.


이렇게 두 번째 질문도 끝났다. 시간만 있다면 계속 쓰고 싶을 정도로 답변 쓰는 것에 재미가 붙었다. 세 번째 질문은 뭐가 나올지 기대된다. 세 번째 질문 다음으로 쓸 수수하지만 굉장한 교열도 나름 공들여 준비했다. 요즘 들어 글 쓰는 것이 즐거워서 일상도 활력이 돌고 있다. 글을 쓸 수 있다는 건 삶에서 정말 소중한 일이라고, 초등학생 일기처럼 마무리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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