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를 선언했다

by 이새벽

휴가를 선언했다. 지난 한 해 동안 쉬는 날이 있기야 했어도 완전히 모든 걸 오프 시킨 적은 없었기 때문에 이번에 작정하고 휴가를 갖기로 했다. 어차피 2024년 얼마 남지 않았기도 해서 한 해도 정리할 겸 보름 동안 나 자신에게 휴가를 주기로 한 것이다.


그동안 못 읽었던 책도 실컷 읽고 인스타에 올리고, 마무리 못하고 저장했던 글도 다 써서 브런치에 올리고, 영상도 마구 만들겠어! 라며 휴가를 선언했다. 나만의 독서 챌린지도 하려고 책 몇 권 인스타 스토리에 설문 올려서 책도 선정하고 그에 맞춰 챌린지 일정표 공지도 만들고 필사해서 챌린지 인증하겠다며 이런저런 문구류를 챌린지 굿즈라며 사기도 했다.


사실 나는 내가 휴가를 가지면 하루종일 누워서 숏츠나 릴스를 보거나, 인스타그램 피드를 계속 들여다보거나, 드라마나 영화 몰아보기 영상을 보거나, 폰게임을 하거나, 웹툰이나 웹소설을 엄청 찾아볼 줄 알았다.


그런데 실제로 하는 일은 이불속에 따뜻해하면서 숨쉬기, 청소하고 환기시키기, 모닝페이퍼 쓰기, 글 어떻게 쓸까 고민하기, 샤워하기, 뭐 이런 거? 어제 독서챌린지 인증하려고 책 읽은 거 필사해서 올린 거랑 환율 알림 와서 환율 확인하고 한국 경제 잠깐 걱정하다 챗GPT한테 물어본 정도가 특이사항일까.


숏츠나 릴스를 안 보는 건 아닌데 잠깐 켰다가 금방 흥미가 떨어져서 끄게 된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다. 이전에는 이제 그만해야지 하면서도 하던 일이 모두 다 흥미가 뚝 떨어지고 생각나지도 않는다. 이게 뭐가 재밌었지? 왜 했지? 싶은 생각도 든다. 내가 이렇게 행복의 역치가 낮은 사람이었나 싶기도 하다.


이제 보니 내가 즐겁다고, 재밌다고, 좋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사실은 정말 즐겁고, 재밌고, 좋은 게 아니라 스트레스 반응이었던 것이다. 사람의 뇌는 좋아하는 것과 원하는 것을 혼동하기 쉽다고 하는데 내가 딱 그 상태였던 것 같다. 마치 담배나 마약처럼 좋은 게 아니라 원하니까 찾게 됐던 게 아닐까.


디지털 디톡스를 일부러 하는 경우가 많은데 억지로 디지털 디톡스를 하는 게 아니라 디지털 디톡스를 해야 할 상황까지 가게 만드는 원인을 들여다보는 것이 필요한 게 아니었을까.


일주일 전부터 모닝페이퍼를 쓰는 것이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 진작 이거 썼으면 번아웃 안 왔을 텐데 싶은 생각도 들었다. 모닝페이퍼를 쓰면서 특히 그동안 내가 일하는 방식, 더 나아가 삶의 방식에 대해서 돌이켜 볼 수 있었다. 삶의 방향을 정하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았음을, 그에 맞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고민하고 구축하고 거기에 적응하고 익숙해지려고 노력을 더 많이 했어야 했다.


다소 충동적으로 갑작스럽게 결정한 휴가 선언이지만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뒷감당은 기운을 차린 미래의 내가 알아서 어떻게든 할 것이다. 다시 방 안의 적막이나 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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