쌉싸름한 홍차 향, 우유의 고소한 맛, 설탕의 달콤한 맛을 한 번에 느낄 수 있는 음료는?
음식 이름 맞히기 퀴즈 대회 왕중왕전에 나가 상대보다 0.01초 빠르게 버저를 누른 뒤 ‘밀크티!’를 외치고는 트로피를 거머쥐는 상상을 해본다. 왕중왕전에서 이렇게 문제 안에 답이 다 있는 문제를 내주지는 않겠지만.
밀크티의 맛을 어떻게 표현하면 가장 적절할까 생각하다가 ‘애매하다’, ‘밍밍하다’, ‘모호하다’는 단어를 떠올려 봤지만 모두 밀크티가 섭섭할 것만 같다. 그나마 ‘오묘하다’가 나쁘지 않다.
오묘한 맛의 최고봉. 여기서 오해는 금물이다. 맵다, 달다, 짜다고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음식들보다 맛있는 정도가 떨어진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오묘한 맛으로서 정말 맛있다는 뜻이다. 원색의 빨간색, 파란색이 파스텔톤의 상아색, 하늘색보다 더 우월하고 아름다운 색은 아니듯, 마티스의 강렬함이 르누아르의 부드러움보다 더 뛰어난 것이 아니듯. 밀크티는 어떠한 강렬한 맛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
그 오묘한 맛을 제대로 느끼기 위한 나의 여정은 점점 더 깊이를 더해 왔다.
많은 이들이 추억을 공유할 자판기의 그 음료로 시작했다. 맛이 참 신기하다고 생각했는데 또 자판기 앞에 서면 뽑아 먹게 되는 맛이었다. 혹시 친구한테 그 음료수 좋아하냐고 묻기도 하고. 가끔 너무 싫다는 격한 반응이 돌아오는 호불호 확실한 음료수이기도 했다.
그 다음은 체인점이었다. 홍차의 향도, 우유의 맛도 한층 더 강하고 깊은 맛이 났다. 큰 빨대로 호로록 빨아서 쫄깃쫄깃 씹어 먹을 수 있는 펄도 늘 추가했다. ‘핫’보다는 ‘아이스’가 제맛이었다. 다만 홀짝홀짝 마시더라도 얼음이 너무 녹아서 적당한 당도를 해치기 전까지는 마셔주는 것이 좋다.
아직도 이곳의 음료를 먹으면 대학교 신입생 시절, 친구와 함께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가게 안으로 문을 열고 들어섰던 기억이 난다. 드디어 대학생이 된 기쁨을 한껏 누리며 마신 밀크티는 자유의 맛이기도 했다.
추운 겨울날에는 ‘로얄 밀크티’도 자주 생각난다. 메뉴판에서 보기만 해도 끌리는 이름이다. 주문 후에 밖이 정말 춥다며 카페 안의 담요를 약간 끌어당기고 있으면 하얗고 작은 티팟에 담긴 밀크티와 잔이 나온다. 따라서 마시다 보면 속은 따끈해지고 마음은 몽글몽글해진다. 다 마시고 나면 다시 나갈 기운도 생기고, 카페에 얼른 들어가려 잰걸음을 했던 아까와는 달리 눈 위에 발 도장을 찍고 싶다는 여유로운 마음도 생긴다.
으레 그렇듯 많이 좋아하다 보면 ‘직접 해볼까?’ 하는 단계에 이른다. 마트에서 홍차 티백을 구입했다. 우유를 끓이는 것이 귀찮아서 전자레인지로 가열해 보았다. 그런 다음 제대로 된 밀크티는 역시 홍차 향이 강해야 하지 않나 싶어서 티백을 한 세 개 정도 담갔던 것 같다. 꽤 쌉싸름하면서 고소하고 따뜻한 맛이 났다.
무설탕으로 건강한 밀크티를 먹어 보겠다는 의지도 있어서 그렇게 몇 번 마셔 보았지만 역시 달아야 맛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티스푼으로 설탕을 한 스푼 넣으면 넣은 줄도 모르겠고, 결국 깊게 생각하지 말고 맛있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과감하게 넣어야 했다. 사람에게는 적당한 당도 필요하다.
따뜻한 밀크티를 해보았으니 차가운 밀크티 차례다. ‘냉침 밀크티’에 도전해 보았다. 텀블러에 찬 우유를 한가득 붓고 이번에도 티백을 세 개 정도는 넣어 보았다. 찬 우유에는 우러나오기가 더 힘들 테니 세 개도 부족할까 걱정이었다. 냉장고에 하루를 넣어 두었다.
티백을 꺼내고 한 모금 마셔 본 다음 어떤 날은 그대로, 어떤 날은 설탕을 섞었다.
이번에는 ‘디카페인’이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고 많이 마시고 싶어서였다. 홍차에도 카페인이 있어 먹고 싶은 만큼 마음껏 마시다 보면 날밤을 꼴딱 샐 수 있으니 말이다.
디카페인 밀크티에는 ‘바닐라 루이보스’ 티백을 활용했다. 쿰쿰한 루이보스 향만으로는 밀크티 맛이 영 살지 않을지 몰라 바닐라로 상쇄해 보려는 시도였다. 역시 티백 세 개는 넣어야 직성이 풀렸다. 바닐라 향 덕분인지 설탕을 넣지 않았는데도 텀블러에서 흘러내린 차가운 디카페인 밀크티의 맛은 꽤나 달콤하게 느껴졌다.
요즈음에는 여러 가지 차나 향, 각종 재료를 이용해서 밀크티의 종류가 훨씬 더 많아졌다. 먹어보는 재미가 있어서 좋지만 새로운 맛을 너무 강하게 넣어서 ‘오묘한 파스텔톤의’ 맛을 잃어버리면 밀크티의 매력을 느끼기 어렵게 되고 만다.
이러한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아슬아슬한 줄타기, 맛의 밀당, 날듯 말듯한 맛의 완벽한 조합을 유지하는 고난도의 기술이 필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