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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브 Sep 13. 2021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어요

회피형 인간의 마음 고백

"넌 박쥐 같은 놈이야. 정치인이 딱 잘 어울려."


친구는 부러움 반, 경멸감 반으로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어릴 때부터 나는 말을 잘했다. 분위기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났고 그걸 이용할 줄 알았다. 상황을 조정할 줄 알았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사람들을 이끌었다. 내가 잘하는 건 사람들에게 캐릭터를 만들어주고 그들이 내 체스판의 그림을 완성시키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내가 얻을 수 있는 건 권력과 관심이었다. 


반대로 누군가 나를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언제나 중재하는 입장에만 섰다. 내 의견을 가지지 않았다. A 의견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A가 맞다고, B 의견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B가 맞다고 달콤하게 얘기해주었다. 모두가 나에게 고마워했다. 그게 내 의견과 다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세상에 절대적인 건 없으니까. 


그런 나를 사람들이 미워하게 된 건, 내 행동이 조금씩 드러났을 때였다. A 집단 사람들은 왜 내가 B가 맞다고 했냐며 따졌다. 너는 A냐 B냐고 물었다. 나는 A도 B도 아니라고 말했다. 그럼 넌 뭐냐고 물었다. 나도 나를 알 수 없었다. 나는 뭘까? 그때부터였다. 사람들은 나를 정치인이라고 불렀다. 박쥐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그 사이에서 내가 부당하게 이익을 착취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술을 먹고 친구와 택시를 타고 가던 어느 날 밤, 친구는 술기운이 올랐는지 나에게물었다. "너는 무슨 생각이야? 진짜 너는 뭐야?" 나는 말했다. "뭐긴 뭐야. 니가 보는게 진짜 나지." 친구는 그렇게 피하지 말라고 하며, 이번엔 진짜 내 생각이 알고 싶다고 했다. 도대체 넌 누구인지, 무슨 생각과 의견을 가지고 있는지, 진짜 너는 무엇인지 물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답하지 않았다.


"10년째 너를 보고 있지만 너는 네 이야기를 한 적이 없어." 나는 답했다. "내 이야기를 하는 게 재밌을까? 진짜 나를 알면 뭐가 달라지는데?" 나는 나를 드러내는 게 두려웠다. 그 누구에게도 내 진짜 속마음을 얘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항상 네가 맞아, 그래 나도 네 의견과 같아,라고 대답해주고 그 사람의 관심과 애정을 받았다. 그렇게 사니까 세상에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없었다. 왜 사람들은 서로 싸우고 미워하는지 알 수 없었다. 


어떤 책은 나를 회피형 인간이라고 했다. 테스트를 했더니 만점에 가깝게 나온다. 심리상담소에서 받은 테스트에서는 내가 위험한 상태라고 꼭 상담을 받아보라고 했다. 내가 위험하다고? 나는 이렇게나 사회생활을 잘하고 있고 친구들도 많은데? 이해할 수 없었다. 돈벌이에 혈안이 된 상담소의 상술에는 넘어가지 않겠다 다짐했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는 두려움이 있었나 보다. 이번이 아니면 평생 이렇게 살아갈 것만 같은. 그렇게 첫 상담을 시작하고, 나는 이후 수년간 계속될 진짜 나를 찾기 여행이 시작되었다.



얼마 전에 술자리에서 어떤 바 BAR의 사장님과 만난 일이 있었다. 그분은 대화하는 데 있어서 애매함이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에는 순수하게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단호하게 싫다고 말했다. 본인만의 확고한 취향이 있었다. 숨기거나 애매한 것이 없었다. 피하거나 잘 보이려 하는 것이 없었기에 나는 몇 분만의 대화만으로도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그분은 나를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즐겼다. 그래서 대화가 즐거웠다.


또한 끊임없는 질문과 그 속에서 생겨나는 뚜렷한 모습들에 나는 어지러웠다. 나는 누군가에게 호기심이 없기 때문이다. 파고들고 파고드는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 속에서 나오는 구체적인 형상들을 통해 나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끊임없이 질문하고 끊임없이 나를 드러내고, 그 사이에서 확고한 나를 찾아가는 것. 


반면에 그 자리에 있던 나는 달랐다. 내가 싫어하는 것이 있어도 그렇지 않다고 애써 부정하고 그 사람이 좋아하는 답을 해주었다. 재밌는 얘기나 남의 얘기를 하다가도 내 얘기가 나오면 얼어붙어서 우물쭈물하다 다른 얘기로 화제를 바꿨다. 타인에게 궁금한게 없었다. 나를 보여주고 싶지도 않았고 그 사람을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다시 어두운 나의 방으로 돌아와 포근히 안기듯 웅크렸다. 그리고 지독히 외로웠다.  


그때서야 친구가 했던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되었다. 친구가 나를 봤을 땐 아마 뿌연 안갯속을 걷고 있는 기분이 아니었을까. 애매모호한 대답, 나를 드러내지 않는 피상적인 대화, 모호한 취향. 같이 있으면 즐거운데 특정 선 이상으로는 절대로 허용하지 않는 모습. 그 안에 있는 버려짐의 두려움과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뒤섞여 있는 내면을 그 친구는 보았던 걸까.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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