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브 Sep 15. 2021

아빠는 폭력이었다

마음속 트라우마 찾아나서기

하고 싶은 것도, 갖고 싶은 것도 많은 어린 시절이었다. 


나는 부모님 지갑에 자주 손을 댔다. 어느 날 우연히 엄마가 서랍 안쪽 봉투에 비상금을 보관한다는 걸 알게 된 후로 그곳은 나의 타깃이 되었다. 혼도 나고 꾸지람도 들었지만 멈출 수 없었다. 처음이 어렵지 점차 대범해지기 시작해 나중에는 다른 이들의 지갑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다. 천 원, 이천 원에서 만원, 이만 원 점차 액수도 커져갔다.


나 스스로도 나를 멈출 수 없던 어느 날, 나는 할아버지 지갑에서 몇만 원을 훔쳤다. 결국 그것이 발각되었고 그 날 만큼은 엄마의 훈육에서 아빠로 바뀌었다. 사람 키 만한 나무 주걱을 들고 와서는 방문을 잠그더니 네가 한 짓이 맞는지 물었다. 나는 아빠가 직접 혼내는 일은 처음이었기에 대답을 못한 채 그저 사시나무 떨듯이 벌벌 떨고 있었다. 아빠는 그것을 인정의 신호로 보았는지 주걱으로 내 머리를 내려쳤다. 빛이 번쩍 비쳤다.


어린이들이 혼날 때는 보통 엉덩이나 손바닥을 맞는데 아빠는 그런 게 없었다. 그냥 눈에 보이는 아무 곳이나 후려쳤다. 머리, 팔, 등 어느 곳도 상관없었다. 그건 훈육이라기보다 누군가를 죽이겠다는 살기였다. 나는 으레 나와야 하는 '잘못했어요'가 아닌 '살려주세요'가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엎드린 채로 싹싹 빌고 있는 나를 내버려 두고 아빠는 방을 나섰다. 나는 다시는 누군가의 지갑에 손을 대지 않겠다 다짐했다.


그것이 아버지에 대한 내 첫 기억이었다. 더 어렸을 적의 기억이 있긴 한데 직접 느낀 기억이라기보다 주변에서 들은 기억이 합쳐진 기억이라 명확하지는 않다. 가족여행을 갔다가 바닷가를 들렀다. 당시 새 차를 뽑았던 아버지는 모래를 털고 차에 타라고 했다. 그러나 아빠가 무서웠던 나는 모래 한 톨이라도 차에 닿을까 봐 신발을 벗어놓고 탔고 아무도 모른 채 출발해버렸다. 집에 와서야 신발이 없어진 걸 안 가족들은 애한테 얼마나 소리를 쳤으면... 이라며 웃었다고 한다.


"어쩌면 그게 남자에 대한 두려움의 근원일 수도 있겠네요"라고 상담 선생님은 말했다. 나는 청소년기부터 일종의 트라우마가 있었는데,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남자를 무서워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길가다가 나를 칼로 찌를 것만 같았다. 그래서 멀리 편 반대서 혼자 다가오고 있는 남자가 있으면 나는 멀찍이 거리를 두고 걸었다. 복부 쪽이 팽팽해지면서 긴장되고 땀이 흐르다가 상황이 끝나고 나면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대학교 때부터는 그것에 더해 선배 증후군도 있었다. 내가 말실수를 하거나 대들면 남자 선배가 나의 뺨을 후려치거나 주먹으로 얼굴을 때릴 것 같은 기분을 자주 느꼈다. 그 누구도 나를 그렇게 대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명백히 앎에도 불구하고, 그 두려움은 마치 내재된 프로그램처럼 형태만 바꿔 계속 발현되었다. 


나는 쉬지 않고 선생님께 다음 기억을 계속 얘기했다. 주걱으로 맞은 사건이 있고 난 후 나는 절대로 지갑에 손을 대지 않겠다 다짐했고 그 다짐을 지켰다. 그런데 어느 날 또 지갑에서 돈이 사라졌다. 나는 아니라고 했지만 아빠는 또 네가 한 짓이냐며 확신했다. 억울했지만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나는 그날 세상이란 어느 누구도 나를 믿어주지 않는 잔인한 곳이라고 확신했다. 


아빠는 엄마와 자주 싸웠다. 아빠도 기가 셌지만 엄마도 기가 세서 한번 싸우기 시작하면 끝장을 봐야 했다. 집안에 온 물건이 날아다니고 욕설이 난무하는 건 기본이었다. 형과 나는 서로 움켜 안고 울면서 그저 끝나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끝나고 나면 온갖 깨진 물건들을 엄마와 같이 치웠다. 어느 날은 아빠가 내가 보는 앞에서 엄마 뺨을 때렸다. 엄마는 네가 뭔데 내 얼굴에 손을 대냐며 소리를 질렀다. 우는 것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형이 형수와 싸우다가 형수의 뺨을 때렸다는 얘기를 엄마가 했었다. 아빠는 엄마한테 손지검 한 적도 없고 우리 집안이 그런 집안이 아닌데 도대체 누구한테 배운 손버릇인지, 라며 혀를 차던 엄마를 보면서 기억은 미화되는 건지 아니면 내 기억이 잘못된 건지 혼란스러워졌다. 똑같이 부모의 모습을 담습 하는 형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결혼을 하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지독한 성찰과 행동 개선 없이는 저도 똑같이 될 거예요 그래서 저는 결혼을 하면 안돼요.라고 선생님께 담담히 얘기했다.


혼란스러운 건 그 외에는 아빠는 다정한 사람이었다. 퇴근하고 오면 자주 치킨을 사 왔다. 우리 가족은 둘러앉아 치킨을 먹었다. 매년 여름 한 해도 빠지지 않고 가족여행을 갔고, 주말에는 항상 가족과 시간을 보냈다. 나이가 들어 엄마가 나를 힘들게 할 때도 아빠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며 항상 지지해주었다. 내가 군대 갔을 때는 인터넷 카페에 매일 와서 내 사진을 찾고 면회도 왔고, 내가 했던 사소한 것들도 어찌나 주변에 얘기하며 자랑했던지 듣는 내가 얼굴이 빨개질 정도였다. 


아버지는 성공한 사업가이자 이제는 내가 그 길을 따라가고 있다. 너무 닮고 싶지만 반대로 너무 닮고 싶지 않은 양가적인 감정이 혼재한다. 밖에서는 그렇게 호탕하고 자신감 넘치는 아버지가 집에 와서는 하루 종일 tv만 보며 축 늘어져 있는 모습을 보면 뭔지 모를 복잡한 감정을 느낀다. 너무나 미웠고 무서웠지만 닮고 싶고 인정받고 싶었던, 그러나 이제는 미워하기에도 존경하기에도 너무 약해진 아빠를 보면서 방향과 목적을 잃어버린 내 감정과 증오를 어디로 보내야 할지 의문이 든다.


묵묵히 듣던 선생님은 그건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위로를 해주었다. 내가 못나서, 잘못 태어나서 그런 게 아니라고 당시 시대가 그랬고 아버지도 그랬을 거라고. 그러나 그런 마음이 아직까지도 나를 붙잡고 있어서는 안 된다고 용서하고 떠나보내야 한다고 했다. 나는 화가 났다. 왜 내가 용서를 해야 하냐고. 가해자는 자기가 뭘 잘못한지도 모르고 멀쩡히 살아가는데 피해자가 왜 용서해야 하냐고 따졌다. 화가 난 채로 나는 상담을 마치고 문 밖으로 나갔다. 저런 감성팔이나 하는 돌팔이에게 내 상담을 맡겨서는 안되겠다고 다짐했다.

이전 02화 심리상담을 시작하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