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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브 Sep 16. 2021

폭력은 짜릿했다

감정 표출하는 법 배우기

그 해 여름은 유난히 푸르렀다. 거리는 푸른 잎들로 싱그러워지고 점차 사람들의 옷차림은 가벼워졌다. 거리의 사람들은 모두 밝아 보였다. 그러나 나는 웃을 수 없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내 마음속을 누군가에게 언어로 표현했다는 것이 몹시 두려웠다. 상담이 끝난 후에도 계속 후회가 되었다. 왜 내가 그런 말을 했을까 하는 후회도 있었고, 상담사의 표정이나 행동 하나하나가 거슬리고 미웠다. 모든 분노는 상담사를 향했고 나는 다시는 내 마음을 열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상담은 1주일에 한 번 진행되었다. 상담 전에는 심박수 기계 같은 것을 꼽고 10분 정도 명상을 하고 상담에 들어갔다. 순간순간의 내 심박수를 눈으로 볼 수 있었는데 가만히 있었음에도 심하게 요동쳤다. 작은 생각 하나에도 요동치는 모습은 내가 직접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느끼지 못했던 심장의 소리였다. 불안도가 높은 사람들은 가만히 있어도 이런 모습이라고 한다. 명상을 해도 쉽게 마음이 진정되지는 않았다. 꾸벅꾸벅 졸다 깨다를 반복하면 어느새 상담실에 들어갈 시간이 되었다.


저번 상담 후로 어떻게 지냈는지 간단한 얘기를 나눴다. 뭐든지 솔직하게 말해보라는 말에 나는 저번 상담 이후로 솔직히 상담사님에 대해서 화가 나서 안 올까 싶었다며 용기를 내어 말했다. 알 수 없는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더 얘기해달라고 그는 말했다. 그냥 내 말에 집중도 제대로 안 하고 날 비웃는 것 같고, 솔루션도 제대로 제공을 안 해주고 본인 말만 하는 것 같다고 나는 답했다. 그리고 솔직하게 누군가에게 이렇게 비난조로 면전에 대고 얘기하는 건 처음이라고 말했다. 그리곤 혼날까 봐 두려워서 웅크렸다. 


그 말을 들은 상담사분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건 상담이 잘되고 있는 좋은 징조라고 말했다. '누군가에게 나쁜 말을 했는데 생각보다 별일 없죠?' 나는 네,라고 대답했다. 나는 항상 화가 나도 참고 또 참았다. 비난이 두려웠다. 그래서 항상 웃었다. 슬퍼도 웃고 아파도 웃었다. 누군가 나에게 못되게 굴어도 그냥 내가 잘못한거니까 하고 꾹 참았다. 이건 아닌 거 같아요, 라는 말조차도 한 번도 못 해봤다. 항상 마음속에서 '네가 뭔데? 네가 그런 자격이 돼? 모든 건 네 잘못이야 네가 똑바로 안 했으니까 사람들이 너에게 화를 내고 미워하는 거야'라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 나도 억지로 타인에게 화를 내야 할 때가 있었다. 군대에서였다. 중간 위치에 있던 나에게 선임들은 후임 관리를 하라며 혼냈다.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던 나는 욕을 하면서 소리를 지르고 의자를 걷어찼다. 후임들은 내가 무섭다고 했다. 근데 나도 그런 내가 무서웠다.내면의 폭력성을 드러내는 순간 나는 짜릿했고 내 앞에 굴복하는 인간들을 보면서 알 수 없는 우월감과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감정에 솔직해지고 그대로 드러내는 건강한 모습이 아니라, 비뚤어진 감정의 폭발이었다.


폭력은 짜릿하다. 대학 신입생 시절, 술에 취한 후배가 몸을 못 겨누자 선배에게 맞는 모습을 보았다. 뺨을 맞고 발로 차이고는 넘어져서 피를 흘렸다. 나와 그 선배는 선배 자취방에 후배를 데려가서 지혈을 시키고 재웠다. 그 아이는 전날 일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고 우리는 웃으면서 다시 헤어졌다. 그리고 몇 년 뒤 내가 그 위치가 되었을 때 정확히 그 자리에서  똑같이 몸을 못 가누는 다른 후배를 내 손으로 때렸다. 손에 전해지는 감촉이 얼얼하면서도 짜릿했다. 똑같이 쓰러져 있는 후배를 보고 나도 그 선배처럼 어른이 된 것만 같았다.


감정을 평소에 제대로 표출하고 흘려보내지 않으면 고스란히 그대로 고이게 된다. 그런 감정들은 차곡차곡 하나씩 쌓여서 비뚤어진 형태로 드러난다. 평소 두려움에 화를 못 내던 내가 화를 내야 하는 상황이 생기자 화를 표출하는 게 아니라 폭력을 드러냈다. 화난다는 감정이 무엇인지도 모르니까 화를 어떻게 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냥 어릴 적부터 봐왔던 것이 폭력으로 화를 표출하던 모습이니 나도 그렇게 따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감정 표출이 서투르게 된 근원적인 사건은 무엇일까? 이어진 상담에서 엄마에 대해 얘기하면서 어쩌면 나는 그곳에 원인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엄마는 나의 사랑이자, 나를 가장 잔혹하게 찢어버린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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