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을 배우지 못한 아이
나, 어쩌면 사이코패스일까
세 번째 상담에서 우리는 슬픔 죄책감 행복 즐거움 분노 등의 여러 가지 감정에 대해 얘기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항상 감정을 숨기며 살아왔던 나에게 가장 어려운 시간 중 하나였다. 내가 세상에서 내가 느끼는 감정은 즐거움과 분노밖에 없다고 답했다. 다른 감정은 느껴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말로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솔직히 답했다.
어릴 적부터 나에겐 도덕관념이나 죄책감, 양심 같은 것이 없었다. 예를 들어, 타인의 물건을 허락 없이 가져가서는 안된다는 말을 글로 는 배웠지만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냥 물건이 여기서 저기로 옮겨가는 건데 뭐가 문젠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남의 물건을 마구 훔쳐갔다.
우유가 먹고 싶으면 친구 우유를 몰래 먹고 모른 척을 했고, 탐나는 학용품이 있으면 몰래 훔쳐서 내가 썼다. 발각될 것이라는 두려움은 있었지만 혼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지 미안함은 아니었다. 나도 언제든 내 것을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게 남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어서 문제였지만. 훔치고, 또 훔쳤다.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말도 마찬가지였다. 왜 거짓말을 하면 안 되는 거지? 이해할 수 없었다. 거짓말은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루는 어떻게 해야 거짓말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해 나 스스로 정리해서 이론으로 만들기도 했다.
<첫째, 거짓말을 할 때는 절대로 눈을 피해서는 안된다. 발각에 대한 두려움으로 정확하게 보기 어렵다면 눈썹 사이 정도가 적당하다. 그러나 절대로 내려 깔아서는 안된다. 둘째, 들통날 것 같을 때는 적당히 미끼를 던져줘라. 사소한 진실을 던져주고 사과를 구하면 큰 거짓은 가려진다. 셋째, 거짓말을 할 때는 나 자신까지 속여라. 완벽한 플롯과 내가 거기에 있다고 상상하고 스토리를 만들어서 반복해서 연습해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내가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할 정도가 되어야 남을 속일 수 있다.라는 식으로 말이다.>
'저, 혹시 사이코패스가 아닐까? 살면서 정말 많이 생각했거든요.' 나는 나지막이 말했다. 양심이나 감정이 학습을 통해서 배워지는 거라면 나는 확실히 사이코패스가 맞을 것이라 확신했다. 왜냐하면 그런 걸 배워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커서 멋진 사람이 되라고 하기보단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 되라고 했다. 학교에서는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라고 하기보단 공부 잘하는 사람이 되라고 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자습시간에 선생님이 잠깐 나가면서 움직이지 말고 조용히 있으라고 했다. 나는 몸이 불편한 친구를 위해 사물함에 물건을 대신 가져다주러 일어섰다. 그리고 물건을 꺼내다가 물어본다고 잠깐 친구에게 갔다가 웃었던 것 같다. 나갔다가 돌아오면서 그 모습을 본 선생님은 화가 나서 어린 나의 복부를 발로 찼고, 나는 한참을 날아가서 열린 사물함에 머리를 찌이고 맥없이 쓰러졌다.
도대체 이게 어린아이한테 가능한 일인가요? 이런 교육을 받던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온전한 감정을 드러내고 아낄 수 있을까요. 그 얘기를 하던 나는 화가 나서 오히려 따지듯이 상담사 선생님에게 소리쳤다. 언제나 그랬듯이 선생님은 알 수 없는 표정과 함께 묵묵히 나의 얘기를 들어주었다. 그리곤 물었다. "지금 마음은 어떤가요? 더 얘기해줄 수 있나요?"
네, 더 얘기해드릴게요. 원하신다면. 나는 화가 나서 더 놀래 보라는 마음으로 다음 얘기를 꺼냈다. 어릴 적 우리 집은 약 10층 높이의 아파트였다. 베란다에서 아버지는 골프 연습을 하셨고 그곳에는 골프공들이 있었다. 나는 아무도 없을 때면 골프공을 밖으로 던지면서 시간을 보냈다. 10층에서 떨어진 골프공은 탕- 소리를 내며 다시 4-5층 높이로 튀어 올랐다가 2-3층 높이로 올랐다가 그리고는 서서히 땅에 멈췄다.
누군가 맞을 거라고 생각했던 건가요. 선생님은 물었다. 처음에는 그런 의도는 아니었다. 그냥 뭔가 재밌는 게 없을까 생각하다가 무심코 했던 행동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는 나도 인지를 하게 되었다. 이 공을 누군가가 맞으면 즉사할 것이라는 것을. 그러나 멈출 수 없었다. 공을 던지고 나서는 누군가가 맞았으면 좋겠다는 마음과 맞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뒤섞여 흥분을 멈출 수 없었다. 나는 공을 던지고 재빨리 숨고는 소리를 들었다. 땅바닥에 맞는 소리가 들리면 누군가의 머리가 아니었음을 비로소 안도하면서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선생님은 그런 감정의 근원은 어디서 왔는지 생각해볼 수 있을까, 물어보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사실 그렇게 슬프지 않았어요. 살면서 몇 마디 나눠보지도 못했고 추억도 없는데 어떻게 슬프겠어요? 그렇지만 전 할아버지를 좋아했어요. 다만 곡소리를 내며 쓰러져 혼절할 정도는 아니었다는 거죠. 그런 저를 보고 엄마는 지 할아비가 돌아가셨는데 눈물 한 방울 안 흘리는 독한 놈이라고 했어요. 그 말을 듣고 나니까 나오던 눈물도 안 나오더라고요.
나는 정말로 감정이 없는 나쁜 놈일까요? 잘 모르겠어요 이제는.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뒤로 앞으로 절대 슬픈 것에 눈물 흘리지 않기로 했어요. 내가 좋아하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안 흘렸던 눈물인데 고작 영화를 보고, 누군가의 슬픈 이야기를 듣고 눈물 흘려버리면 그 의미가 퇴색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그 뒤로 아무리 슬퍼도 울지 않았어요. 혹여나 울까 봐 슬픈 마음만 들어도 항상 웃었어요. 그러니까 이제는 슬픈 감정이 뭔지도 모르겠어요. 나는 씁쓸하게 답했다. 다음으로 우리는 행복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