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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브 Oct 07. 2021

잠 들기 두려운 밤

꿈이 나에게 말해주는 것들

잠깐 눈을 붙인 나른한 오후면 나는 지독한 악몽에 시달린다. 그것은 어릴 적부터 나와 함께 자라던 것이다. 떼어내려고 안간힘 써봐도 그림자처럼 그 꿈은 언제나 나를 따라다녔다. 밤보다는 주로 해가 가득한 낮에 잠들었을 때 악몽은 찾아온다. 깨고 나면 침대는 땀으로 흥건해있고 몸은 만지면 델 듯이 뜨거워진다. 네 번째 만남에서 선생님은 '꿈'에 대해 얘기해보자고 했다. 밤에 꾸는 꿈을.


꿈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전달한다. 정신분석학에서 꿈은 무의식의 발현이라고 하는데 해당 분야에 대한 지식이 없는 나로서는 우리 무의식이 어디 저장되고 왜 저장되는지, 굳이 꼭 꿈을 통해서만 상징적으로 나타나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그냥, 그렇다고 들었다. 조금은 억울한 기분이다. 내 트라우마나 잠재의식이 다 저장돼 있다면 그냥 명쾌하게 알려주면 안 되는 건지. 


선생님에게 말했다. 쫓기는 꿈을 항상 꿔요. 세상의 종말이 오거나 집에 강도가 들거나 아무튼 어떤 빌런이 등장해요. 그리고 저는 항상 침대 밑으로 숨었죠. 그리고 모든 가족들이 하나둘씩 살해당해요. 저는 침대 밑에서 그 처참한 광경을 소리로만 듣다가 결국 마지막으로 발각되죠. 나도 죽겠구나, 하는 마지막 순간에 꿈이 깨요. 그러고 나면 한겨울에도 몸이 탈 듯이 뜨거워져 있어요. 한 때는 잠자는 게 너무 두려웠어요.


혹은 도망칠 때도 있어요. 죽어라 도망치고 살인자는 계속 쫓아오다가 결국에는 잡히죠. 어떤 쪽이든 결말이 죽음으로 끝나는 건 좀 슬픈 일이네요. 꿈은 현실의 발현이라는 말을 듣고 지금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꿈의 이유를 알 것 같긴 해요. 어릴 적 저는 농에 들어가 혼자 있거나, 침대 밑에 들어가서 숨어있는 걸 좋아했어요. 아늑한 느낌이 좋았달까. 그리고 가족들의 간섭을 피할 수도 있었고, 무엇보다 내가 없어진 걸 알면 가족들이 찾아주었거든요.


쫓기는 꿈은 현실에서의 스트레스나 불안의 발현이겠죠. 저도 좀 찾아보긴 했거든요. 어디가 그렇게 불안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근데 웃기는 게, 이걸 알면 뭐해요? 그런다고 꿈을 안 꾸는 것도 아니잖아요. 불안한지 안다고 불안이 사라지나요? 정말 순수한 호기심으로 묻는 나에게 선생님은 치료는 문제가 안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말해주었다. 이쯤에서는 사실 의구심도 들었던 건 사실이다. 매회 비싼 상담료를 내며 눈물 콧물은 빼고 있는데 도대체 치료가 되고 있긴 한 건지. 


다음으로 많이 꾸는 꿈은 여자에 관한 꿈이었다. 공통점은 모두에게 얼굴이 없었다. 몸은 분명히 무엇인지 아는데 (주로 야한 동영상에서 본 전라의 몸이었다) 그들에겐 표정이 없었다. 직업도 다양했다. 어느 날은 활을 든 아마존의 모습으로, 어느 날은 그리스 신화의 여사제로, 어느 날은 그저 평범한 직장인으로 때로는 엄마의 모습으로. 그리고 나는 대부분 그들과 다양한 몸짓으로 행위를 나눴다. 그러나 그들에게 표정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얼굴이 없었다.


아마 여성의 꿈은 엄마와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더 물어보고 싶지 않았다. 엄마와 관계를 나누는 꿈을 꾼다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 부끄러웠을 뿐만 아니라 누군가와 성에 대한 얘기를 한다는 게 너무 쑥스러웠다. 


도망치거나 살해당하는 꿈과 여성과 관계를 나누는 꿈 외에는 주기적으로 꾸는 꿈은 없었고, 상황에 따라 다른 꿈을 꿨다. 당시 있었던 인상 깊었던 일이나 감정들을. 특히나 부끄러운 일이 있었던 날에는 어김없이 상황만 변해서 똑같은 사건이 꿈에서 그대로 펼쳐졌다. 그런 점에서 나는 꿈을 많이 꾸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선생님은 이 날부터 힘들겠지만 침대에 노트를 두고 꿈을 꿀 때마다 기록해보자고 하였다. 나는 혹여나 놓칠까 봐 비몽사몽인 상태에서도 열심히 꿈을 기록했다. 그리고 내가 알아낸 바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 꿈은 형태만 달리하여 반복된다. 같은 감정을 다른 형태로 모양만 바꿔서 계속해서 변주된다. 치욕감에 대해서 애착감에 대해서 불안에 대해서 변주되어 진행된다. 둘째, 꿈은 현실을 반영한다. 적어놓고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전날이나 최대 2-3일 전에 있었던 일임을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셋째, 내가 느낀 감정의 크기와 꿈의 주제는 다르다. 내가 크게 느꼈던 감정이라도 꿈으로 발현되지 않을 수 있고 내가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감정이 꿈으로 발현될 수도 있다. 이것은 내 무의식에서 얼마큼의 비중으로 받아들였는가에 따라 다른 것 같다.  


이때 아마 내 모든 감정과 트라우마는 반복되어 발현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상담을 통해 선생님이 요청한 것들을 최대한 하고자 노력했다. 사람들과 만날 때는 타인의 말과 표정에 신경 쓰기보다 단어 그 자체에 집중하고, 내 상상을 주입하지 않는 연습을 했다. 그리고 혼자 있을 때는 내 생각과 꿈을 계속해서 기록하고 내 머릿속의 패턴을 들여다보았다. 극적인 변화가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내 우울증은 이 두 가지만으로도 빠르게 나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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