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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브 Oct 08. 2021

회피형 남자의 연애

다섯 번째 심리상담, 도망쳐버리다

심리상담을 받기 위해 상담소를 방문하던 첫날, 용기 내어 문을 연 그곳에서 선생님은 물었다. '뭐 때문에 상담을 오게 되셨나요?' 조금 엉뚱하게도 나의 상담 이유는 '연애를 잘 못하겠어요.'였다. 우울해요, 인간관계가 힘들어요 이런 게 아니라 연애를 못하겠어요, 라니. 나도 좀 이상했던 것 같다. 상담 선생님이 연애 코치는 아니지 않는가. 


어릴 적부터 누군가와 깊게 연애를 한다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상대가 조금만 나에게 마음을 열거나 의존하면 그 순간 마음이 급속도로 냉랭하게 식었다. 또한 항상 도망칠 구석을 만들어놓고 상대가 선을 조금만 넘어가면 바로 도망쳤다. 싸우지 않았고 다툼이 있으면 무조건 내가 미안하다고 한 다음에 마음을 정리해버린다. 문제 해결에 대한 의지가 없었고 관계 유지에 대한 열망은 제로.


속 깊은 얘기는 절대 꺼내지 않았다. 연인이라면 서로의 깊은 부분을 보여주고 위로하고 위로받으면서 마음이 깊어져야 하지만 나는 어떻게 그렇게 하는지도 몰랐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조금만 우리 관계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화제를 돌렸다. 웃기게도, 그러고는' 나는 쿨한 사람이야. 너도 언제든 나를 떠나고 좋고 나도 언제든 너를 떠날 수 있어' 라며 온갖 쿨한 척은 다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지도 못하면서.


 '여자 친구에게도 내 본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페르소나를 쓰는 것 같아요. 마치 침실에서도 가면을 쓰고 있는 기분이랄까요.' 당연한 수순일까? 연애를 깊게 해 본 적이 없었고 대부분 한 두 달 사귀다가 상대방이 헤어지자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왔다. 아마 처음 생각했던 모습과 사귀고 나서 너무 달랐던 것 아닐까 싶고, 아무리 사귀어도 마음을 열지 않는 모습을 상대방은 금방 알아챘던 것 아닐까.


나도 이런 내가 싫었고 문제가 있다는 건 알았다. 이제 나도 이런 연애를 끊고 제대로 마음을 나누는 깊은 연애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비참하게도 언제나 그렇듯 다시 반복되는 문제에 빠져버렸다. 회피형 성격은 잘못 형성한 애착관계나 인간관계 -> 잘못된 인지체계를 형성 -> 회피형 관계의 발생 -> 잘못된 인지체계의 강화 순으로 계속 악순환되어 이루어지는데 너무 견고하게 짜여있어서 혼자서 풀기가 어렵다. 그래서 상담소를 찾아야 하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본인이 무엇을 잘못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혹시라도 내가 회피형 유형과 연애를 하고 있다면 내가 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말고 상담을 권유하자.


상담에서 선생님이 했던 말이 있다. '저 마음속 깊숙한 곳에는 스피커가 하나 있어요. 스피커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대로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잘못된 메시지를 넣으면 잘못된 소리가 계속 나오고 바른 메시지를 넣으면 바른 소리가 계속 나와요. 스피커는 잘못이 없죠. 입력한 대로 출력하는 거니까. 누군가가 나를 미워해, 나를 떠날 거야 라고 입력하면 그 소리가 사람을 만날 때마다 계속 울려 퍼지는 거예요. 근데 무서운 건, 그 소리가 계속될수록 증폭돼서 나중에는 다른 내 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가 없어요. 그 스피커의 메시지를 고쳐주는 게 상담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내 머릿속과 꿈을 탐구하면서 어디서부터 스피커의 메시지가 잘못되었는지를 집요하게 찾아 나섰다. 앞선 글에서 다루었던 것들인 '아빠의 폭력, 엄마의 외면, 가정에서의 애정의 부재, 비뚤어진 인간관계' 등을 접하면서 마음속에 위태위태한 돌탑을 계속 쌓아왔다. 폭력적인 경험과 버려짐의 과정을 통해 나는 점점 사람들에게 마음을 여는 것이 무서워지게 되었다.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마음속 스피커에서 '너는 사랑받을 가치가 없어. 지금까지 계속 그래 왔잖아? 네까짓 게 뭔데? 엄마는 맨날 너는 쓸모없고 보잘것없는 인간이라고 했어. 네가 얼마나 하찮고 별로인지 알게 되면 사람들은 너를 비웃고 무시할 거야. 그러니까 그전에 빨리 도망쳐야 해.'라는 말이 미친 듯이 쾅쾅 울려 퍼졌다. '이전에도 그러했듯, 다음에도 그럴 거야.'라는 것이 이 스피커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그 일련의 사고 과정을 이해하게 되면서, 스피커 소리가 나올 때마다 조금씩 용기있게 목소리를 냈다. '아니야, 선생님은 내가 생각해보다 괜찮은 사람이라고 했어. 그리고 사람들은 너를 그렇게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어. 아무도 그렇게 욕하지 않아. 제발 한 번만 믿어봐.' 그렇게 내 마음은 조금씩 나아졌고 당시 힘들었던 회사 상황도 해결되면서 점차 밝아졌다. 선생님은 나를 볼 때마다 빠른 시간에 호전된 케이스여서 뿌듯하다며 웃으셨다. 


점차 회복되면서 어느 순간부터 상담비용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혼자서도 충분히 마음속 문제를 해결하고 컨트롤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도 생겼다. 그래서 상담이 완전히 끝나지 않았음에도 연락을 끊고 일방적으로 상담을 마무리했다. 정확히는 도망쳐 버린 것이다. 그리고 일 년 뒤, 나는 더, 완전히... 망가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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