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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안 Nov 08. 2020

교문 앞에서

마지막 시간 강사 생활을 기억하며



https://youtu.be/YB4IV27-i6 (오늘의 BGM)





2016년 10월 마지막 주 금요일. 인천의 모 사립여고 학생부실에서 책 쌓는 소리가 들렸다. 그곳엔 교사로 추정되는 한 여자가 있었고, 그녀는 자신의 책상 위에 있던 책들을 상자 안에 하나둘 담고 있었다. 책은 고3 영어 교과서와 EBS 수능 특강 문제집들이었다. 아마도 그녀의 담당 과목은 영어였나 보다. 쌓여가는 책 중엔 고등학생용이 아닌 것도 보였다. 특이하게도 그것들의 제목은 모두 특정인의 이름을 포함했다. ‘윤도형의 전공 영어’ 혹은 ‘전태련의 교육학’. 이제야 그녀의 정체를 파악했다. 그녀는 교사가 아니었다. 그녀는 정교사 1급 자격증이 없는 계약직 강사이며, 동시에 그 1급 자격증을 따기 위해 임용고시를 치러야 하는 수험생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바로 나였다.


10월 28일, 나의 근로 계약은 종료되었다. 당분간 생계유지는 어렵겠다는 생각에 근심이 쌓였지만 기쁘기도 했다. 더는 학생들에게 계약직이 아니라고 거짓말을 하거나 정교사 무리에서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틀 후에 나는 인천에 없다. 제주도에 머물며 밀어놓았던 생각을 정리할 계획이었다. 특별한 여행 일정 같은 건 없었다. 그저 망망한 바다를 보고 걷고 싶었다. 내 몸과 정신이 학교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질 때까지 걸을 셈이었다.



정리된 책상은 새것처럼 깔끔해졌다. 그것은 마치 원래 주인이 없었던 것처럼 말끔한 자태로 다음 주인을 기다리는 듯했다. 사실 나도 이 책상의 온전한 주인은 아니었다. 쉬는 시간마다 말썽꾸러기들이 몰려와 시시콜콜 이야기할 때면, 책상 주인은 그들이 되었다. 어느 날엔 애인도 없는 내게 찾아와 연애 상담을 요청하던 동료 교사가, 또 진로 때문에 부모님과 다퉈 엉엉 울던 제자의 것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정교사가 아닌 나는 그 책상의 진짜 주인이 될 수 없었다. 12시가 지나면 원래대로 돌아가는 신데렐라처럼 어설프게 내 흔적을 남기고 싶진 않았다. 그녀는 두고 온 흔적으로 공주가 될 운명이었지만, 내 결론에 반전은 없었다.


손때가 묻는 지우개 똥마저 남기지 않으려 바닥을 쓸고 또 쓸었다. 쓸다 보니 내 것이 아닌 물건들도 있었다. 먼지를 먹어 형체가 불분명해진 마이크 덮개와 분필 홀더였다. 이전 책상 주인은 목소리가 작았던 걸까? 그 강사는 분필의 촉감을 싫어했나? 그것보다 덮개와 홀더의 주인은 같을까? 같다면 그 사람은 여자였을까 남자였을까? 그 혹은 그녀는 이제 진짜 교사가 되었을까 아니면 또 다른 학교의 스쳐 갈 과거가 되어가고 있을까. 나는 책상의 다음 주인들이 나를 모르길 바랐다. 내가 여자였을지, 펜보다 연필을 좋아했을지, 또 그들의 현재에 내가 정교사가 되었을지 궁금해하지 않았으면 했다. 고로 내 정체가 드러날 모든 증거를 인멸하리라. 정리를 마친 후, 교무실에 있던 선생님들께 차례로 인사를 드렸다. 나보다 좀 더 늦게 퇴사하는 동료 강사는 단짝을 잃었다며 아쉬워했지만, 말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한 선생님들과는 마지막까지 어색했다. 작별을 고하는 그들의 시선은 나를 지나 곧장 시계로 옮겨졌다. 오후 5시 반. 그들 앞에 놓인 건 퇴근이었고, 나는 퇴사를 앞두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선 교문 앞. 이제 한 발자국만 더 나서면 나는 자유의 몸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몸은 선뜻 자유를 원하지 않았다. 그의 두 다리는 망설이고 있었다. 그토록 갈망했던 자유 앞에서 나는 왜 머뭇거리는 걸까. 교문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나는 교문이 그리워졌다. 그 순간, 교문 밖에서 한 학생이 헐레벌떡 문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그녀는 내게 아침 인사도 생략한 채 숙제가 많다고 떼를 쓰며 다가왔다. 그 뒤로 내 어깨에 팔을 걸치며 장난치는 아이가 지나쳐갔고, 어떤 아이는 나를 보고 달려와 반갑게 인사를 했다. 교문 옆 담벼락엔 학생부실 부장님이 서 있었다. 그는 다양한 빵이 담긴 봉투를 들고 있었고, 내게 단팥빵을 건네며 웃었다. 단팥빵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간식이었다. 운동장에선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점심 식사 후 커피 내기를 하자며 배드민턴 채를 흔드는 동료들이었다. 교문에는 지난 시간 나를 만들고 채워준 사람들의 흔적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흔적들 사이로 수많은 내가 흩날렸다. 많은 나는 서로 다른 형태로 존재했지만, 모두 같은 얼굴이었다. 환히 웃는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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