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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글 Oct 31. 2021

신대, 방 구했습니다.

서른둘, 첫 독립을 시작하다.  





2021년 10월 2일 토요일. 날씨 화창함. 



내 나이 서른 하고도 둘. 약 10년간 벼르고 별렀던 독립을 마침내 실현하는 날이 왔다. 세상에나 마상에나 

여러분, 드디어 제가 자취를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렇게나 컸습니다! 왕복 3시간의 출퇴근을 1/6으로 줄여버리는 클라아쓰. 홍대 합정까지 20분, 마음의 고향 문래까지는 고작 10분 남짓. 이게 바로 제 첫 독립 주거 공간의 위력이다 이 말씀입니다. 신대방의 한 골목길에 자리 잡은 빌라. 이제 그곳에서 약 N년간 이 몸이 거주할 예정이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부모님과 함께 부동산에 들어섰다.




"오, 엄마. 임대인 00 사장님, 임차인 영글. 오 나 임차인 대박."

"아휴~! 조용히 하고 잘 읽어봐."

"계약서 내용 다 읽어보셨죠? 자, 이제 여기만 사인하면 끝입니다."

"영글 씨, 이곳에서 행복하게 잘 살길 바라요."




어머나. 부동산 중개하시는 분들은 원래 이렇게 스윗하신건가. 저 진짜 잘 살게요! 여기서 돈 많이 벌면 딱 3평 더 큰 곳으로 바로 이사 갈 거지만. 하하하.



첫 주거 계약이라 그런지 계약서에 모르는 말투성이다.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은 세상.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난 혼자가 아니다, 무려 부모님과 함께 왔으니 사기 칠 순 없을 것이라는 비장함을 풍기며 계약서를 꼼꼼히 살펴보는 데 아빠가 안 보인다. 아빠 뭔데. 딸내미가 일생일대의 거래를 하고 있는데 어디 간 거야 대체.



창문 밖을 바라보니 아빠가 한 아주머니와 대화 중이다. (나중에 들었는데, 이 아주머니는 옆 부동산 주인이었다.) 이렇게 무심하다고? 아빠, 나 결혼할 때 울 거라며... 엄마랑 둘이 사는 거 재미없다며.



여차여차 엄마 손 붙들고 계약서에 사인한 뒤 인천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엄마도 마음이 뒤숭숭했는지 내 방에 불쑥 찾아 들어왔다.





"우리 딸, 드디어 이뤘네. 나가서 한번 잘 살아 봐. 엄마 아빠 소중함도 좀 알고."

"뭐야~, 그건 원래 알았거든? 아니 엄마, 아빠는 계약서에 사인할 때 어쩜 한 번을 같이 안 봐주냐? 딸내미가 걱정되지도 않나."




"느이 아빠 울었다, 아까 전에."





설렘 가득했던 계약 날, 아빠가 울었다. 2주나 남은 이삿날을 위해 들뜬 얼굴로 짐 정리를 고민하는 나를 뒤로 아빠가 소리 없이 울었다. 유달리 아빠의 성격을 많이 닮은 나는, 아빠를 미워한 날이 많았다. 아빠가 생각하는 세상과 내가 원하는 세상은 흑과 백 같았고, 그런 아빠를 설득하느라 지난 10년간 싸우고 화해하기를 반복했다. 이러다 엄마와 아빠를 놓아버릴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 즈음, 독립에 대한 결심을 생의 첫 우선순위로 두었고, 월세 보증금이 모이자마자 바로 독립을 선언했다. 바쁜 직장 생활로 자취방을 직접 알아볼 시간이 나질 않자, 부모님은 나 대신 서울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방을 알아봐 주셨고, 그들의 부지런함 덕분에 좋은 집을 일찍 구할 수 있었다. 점찍어둔 방을 본 이틀 뒤, 우리는 곧장 부동산으로 향했고, 그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계약서에 사인하는 날, 아빠는 마음 추스를 새 없이 딸의 손을 잡고 부동산에 들어섰다. 딸아이의 독립과 동시에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세 식구의 생활. 엄마가 말하길, 아빠는 계약서를 보자마자 눈물이 핑 돌아 헛기침만 연신 내뱉다 밖으로 나가셨다고. 계약서 한 장 한 장에서 느껴지는 자유의 맛을 만끽하는 동안, 아빠는 곧 비워질 딸 방에 남을 쓸쓸함을 일찌감치 맛본 것이다.



아빠의 여린 마음을 쏙 빼닮은 둘째 딸. 엄마의 말을 전해 듣자마자 나는 아빠처럼 울었다. 영원한 이별이 아닌데 왜 그러냐며 낄낄대며 웃었지만, 눈가엔 고인 눈물이 투둑 떨어졌고, 엄마 역시 아빠는 못 말린다며 배꼽을 잡고 웃었다. 작은 두 손으로 내 손을 꼭 붙잡고, 코 끝이 뻘게진 채로.





서른둘, 나는 독립을 했다.

부모님으로부터 한 걸음 멀어진 삶이 내게도 찾아왔다.




< Ep 01. 신대, 방 구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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