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여행, 우리가 해냄 (上)
해남이 남해 아니야?
뚱딴지같은 소리가 터져 나온 곳은 파주의 한 스타벅스, 그것도 매장 한가운데였다. 순수한 얼굴로 건넨 나의 질문에, 맞은편에서 라테를 마시던 아빠의 손이 잠시 멈짓하더니 이내 잔을 내려놓았다. 그 짧은 멈춤에서 ‘아, 나 또 뭔가 크게 잘못짚었구나’ 싶은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아빠는 괜히 컵 옆을 만지작거리다 사람들이 듣지 않았는지 슬쩍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는 푸흡, 실소를 터트리며 말했다.
"차라리 잘됐다 영아야. 남해를 가자! 엄마가 남해를 가고 싶어 했거든."
이 꼬여버린 여행기의 시작은 일주일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약 3년 만에 부모님과 떠나게 된 여행이었다. 회사에서 입사 3주년을 맞아 2주간의 리프레시 휴가를 내준 것이 계기였다. 하지만 정작 나는 그 소식이 달갑지 않았다. 더욱이 그 무렵의 나는 퇴사를 하나의 답안처럼 염두에 두고 있던 터였다.
'2025년 8월 3주년 근속자 축하 안내'라는 제목의 공지가 회사 인트라넷에 올라왔고, 나는 그 게시글을 한동안 아무 표정 없이 바라봤다. 게시글 안에 적힌 여러 동료 이름 사이에서 내 이름을 찾아가는 짧은 찰나, 지난 3년이 한꺼번에 스쳐 갔다. 종이 달력을 벅벅 찢듯 기념할 틈도 없이 찢긴 시간들이 너저분하게 널린 채 발치에 쌓여있는 듯했다. 입사 당시 기대했던 역할과는 전혀 다른 업무를 맡았고, 끝도 없이 이어지는 책임 전가와 뒷담에 나는 신물이 나 있었다. 번아웃인지 무기력인지 모를 흐릿한 상태에서 2주를 쉰다고 한들 무엇이 달라질까. 그저 침대에 붙어 있자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막상 휴식기가 가까워지자 마음 한구석이 씁쓸해졌다. 애써온 3년이 물 먹은 솜사탕처럼 스르륵, 침대 속에서 허무하게 사라질 것 같아져 시작도 하지 않은 휴가가 벌써 아쉬워졌다. '어디든 집 밖에 한 번은 나가보자.' 그 결심 하나로 여행 계획이 시작됐다.
하지만 국경을 넘을 에너지는 없었다. 그럼에도 가능한 한 멀리 가고 싶었고, 그 욕망의 화살표가 여의봉처럼 쭉 늘어나 도달한 지점은 해남이었다. 한국의 땅끝 마을이라 불리는 곳. 3~4일간 틈틈이 숙소 정보를 찾아보며 마음에 드는 곳을 골라 속전속결로 예약까지 마쳤다. 그런데 도대체 어디서부터 문제가 시작된 걸까. 왜 아빠와 카페에서 다시 확인한 예약 지는 전라남도 해남이 아니라 경상남도 남해인가. 그리고 이 사실을, 나는 왜 여행을 이주일 앞두고서야 알게 된 걸까.
같은 시각. 스타벅스의 문이 열리더니 야채를 가득 담은 장바구니를 손에 든 아주머니 한 분이 요란스럽게 들어왔다. 그녀는 우리 엄마였다. 아빠에 이은 또 다른 나의 여행 메이트. 잠깐만. 가만있어봐. 생각해 보니 여행을 준비하던 내내 엄마가 옆에 에있었잖아? 한창 인터넷 파도 속을 헤엄치며 해남 숙소를 구경할 때마다 "남해 좋지~"를 외치며 어깨너머로 고개를 들이밀던 그녀였다. 근처 친언니네로 매일 출근해 육아를 돕고 온 밤이면, 엄마는 내 여행 계획 얘기를 들으며 입맛을 다시곤 했다.
고생한 나를 위한 휴식인 만큼, 처음에는 혼자 떠날 계획이었다. 그럼에도 마음 한편이 계속 찝찝했던 건 부모님 때문이었다. 황혼 육아 노동 중인 그들을 뒤로하고 나 혼자만 즐거워지는 것 같아서였다. 결국 나는 엄마에게 어디를 가고 싶은지 물었고, 그녀는 늘 같은 말을 했다. "남해 어디든 바다면 보면 좋겠어."
그때부터 혼자만의 여행은 부모님과의 여행으로 자연스럽게 방향을 틀었다. 이후 엄마와 여행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 우리는 '남해'와 '해남'을 아무렇지 않게 뒤섞어 쓰기 시작했고, 그렇게 도(道)와 도를 넘나드는 착각 끝에 남쪽 바다가 가장 잘 보이는 남해의 한 숙소를 아무 의심도 없이 예약해 버린 것이다.
"경상도와 전라도를 가로지르는~" 조영남의 <화개장터>를 흥얼거리며 낄낄대는 아빠 앞에서, 나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숙소 주소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아빠의 휴대전화 하면이 내 시야 위로 스르륵 겹쳐졌다. 2년 전, 그가 메모장에 적어둔 노트였다. '남해'라고 쓰인 제목 아래로 '다랭이마을', '섬이정원', '독일마을' 같은 지명들이 가지런히 적혀 있었다. 우연히 엄마와 함께 본 TV속 남해에 반해 언젠가 엄마와 같이 가기 위해 적어둔 흔적이라고 했다. 말하자면, 2년간 봉인돼 있던 낭만의 지도가 지금에서야 해제된 셈이다. 나는 아빠와 눈을 맞추며 "차라리 잘됐네"하고 웃었다. 그렇게 10월 13일 월요일, 돌고 돌아 2박 3일간의 남해 여행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