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금안 May 28. 2020

일단 좀 더 도망쳐보겠습니다

I'm not too bad



다시 취준생이 된 지 한 달째. 예기치 못하게 생긴 공백기를 메워줄 수업을 들으러 지하철을 탔다. 격주 월요일 저녁마다 열리는 ‘카피라이팅’ 수업. 이것은 서울 시청역 인근의 한 오래된 건물에서 진행된다. 온통 노랗게 칠해진 외벽 덕분에 특별한 간판이 없어도 건물이 금방 눈에 띄어, 길치인 내겐 더없이 좋은 장소다.



간판’. 이 단어를 되새길 즈음 지하철 안에선 노량진역에 다다랐다는 방송 멘트가 흘러나온다. 앉은 자리에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니 건물 사이로 빼꼼 모습을 드러내는 임용고시학원 간판. 누구나 자신을 한순간에 특정 시점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소재가 있다고 했던가. 가령, 나는 지미 추 플로럴 향을 맡으면 어학 연수차 처음 미국 땅을 밟았던 스물한 살의 나로 돌아간다. 그리고 바로 이곳 노량진역. 여기를 지나갈 때면 순식간에 지하철이 타임머신으로 변해 나를 수험생 시절로 끌고 간다. 네 번째 겨울이 찾아왔던 2년 전.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임용고시 2차 준비를 끝으로 수험생활을 그만두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잿빛 노량진 타운에 내가 있었다.



노량진의 저녁



항상 1-1번 문에 줄을 섰다. 개찰구로 향하는 계단과 가장 가까운 곳. 1번 출구로 나와 왼쪽으로 걸어가면 차례로 보이는 역사 바로 밑 노량진 서점과 4층규모의 카페 할리스, 그리고 버거킹. 그 뒤로 보이는 거대한 ‘박문각 임용고시학원’ 간판 아래에 수험생들이 열을 맞춰 서 있다. 그 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계단을 타고 올라갔던 4층 강의실. 수험생 때의 기억을 더듬으니 얼마 전 새해맞이 겸 노량진에서 만난 친구가 떠오른다. 힘내’ 라는 격려를 냉소와 애정이 섞인 ‘너나 해’로 되돌려주는 그녀는 올해로 벌써 5년째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이다.



"How are you?"

"I’m fine thank you, and you?"

"시험준비는?"

"그렇지 뭐."

"올해는 붙을 거야 친구야."

"취업은?"

"나도 그렇지 뭐."

"넌 능력 있으니까 잘 되겠지."



서로의 물음에 예상되는 답변을 착실히 달아주는 (그러나 진심임은 틀림없는) 패턴 대화를 이어온 지 어언 5년째. 요즘은 중학교 영어 교과서 1단원에서도 'How are you?' 에 기계적인 대답 대신 'Not too bad' 정도는 표현해보라 조언해주거늘. 교과서보다도 개정되지 못한 그녀와의 대화 속에서 한 장면이 또렷이 생각난다.


“난 솔직히 지금 내 나이에 새롭게 취업할 엄두가 안 나더라. 그래서 그냥 또 시험 봐."

"난 오히려 시험 준비 5년은 버틸 자신이 없던데…. 차라리 무에서 시작하는 거라고 핑계라도 대게 취업노선으로 바꾼 거야."  

"그래? 그럼 둘 중에 누가 더 현명한 거야?"



서로가 더 현자(賢者)라고 웃픈 위로를 주고받던 우리는 시험을 함께 준비했던 시간을 떠올렸다. 1,800원짜리 명량핫도그 하나로도 스트레스를 풀 수 있었던 시절. 합격자의 수험서를 갖고 있으면 성공 기운을 받을 수 있다는 소문에 수업을 빼먹고 노량진의 모든 서점을 돌아다니기도 했던 철없던 그때. "맞아, 그랬었지" 번갈아 맞장구를 치다 보니 점점 이십대 중반의 우리로 어려졌다. 첫 시험을 앞둔 희망찬 초심자처럼, 정장이 잘 어울리는 전문직 여성을 꿈꾸는 풋내기들처럼. 예비교사라는 명확한 꿈이 있던 7살 어린 나는 지금의 내가 부러워할 만큼 열정이 많던 꽤 멋진 사람이었는데.





지하철이 다시 출발한다. 한강 너머로 어린 나와 노량진이 멀어져간다. 아직 실패의 상처는 아물지 않은 걸까. 멀어져가는 노량진만큼 성큼성큼 다가오는 현실에, 흔들리는 손잡이처럼 마음이 덜컹거린다. 아, 큰일 났다. 이런 감정이 몰려오면 걷잡을 수 없는데…. 과거에 더는 얽매이지 말자고 큼지막하게 적어둔 2020년 새해 목표가 3주도 채 안 서 무너지나? 인사이드 아웃(애니메이션)의 '슬픔이'로 변해가려는 순간, 남영역에 도착한 전동차가 서울역을 향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하철 내부의 전등이 꺼지자, 우울한 마음에 내리꽂힌 핀 조명은 더욱 강렬해진다.



핸드폰이 울렸다. 지난주 예배에 나오지 않은 내가 걱정되었다는 A 언니의 퇴근길 전화다. 반가운 목소리에 주말 내내 몸살을 앓다 겨우 살아났다며 응석받이를 하듯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투욱, 속마음이 나왔다.


"그런데 언니, 사실 독감 걸려서 나쁘지 않은 것 같아."

"독감 덕분에 눈치 안 보고 쉴 수 있는 시간이 더 늘어난 거지 뭐"


요즘 이 백수는 독감과 수업으로 심리적 안정 확보 중이라는 보고를 마칠 즈음 지하철이 시청역에 도착한다. 여기서 내려야 한다. 전화를 끊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목을 한 번 가다듬는다. 자, 이제 문이 열리면 오늘의 우울에서 도망칠 수 있는 은신처가 있다. 그러니 도망자여, 아무 일 없단 듯 근심을 감추고 뛰어나가자.




"I’m not too bad!"




#에세이 #사연있는_장소 #노량진역 #도망자 #imnottoobad







매거진의 이전글 짧은 머리는 Steady Pick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