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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필소년 May 07. 2021

사랑과 맞바꾼 것들

지긋지긋한 가난마저 지겨워 질 때 쯤, 나는 이 사랑을 끝내야 겠다는 결심을 했던 것 같다.

나의 무능함을 들키기 싫어서 였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렇게 죽음만이 갈라놓을 수 있을 것 같던 우리의 사랑은 끝이 났다. 차라리 비장하기라도 했다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지만 3년이 넘도록 쌓아왔던 신뢰와 의지란 것들은 생각보다 쉽사리 무너지더라.


익숙한 허전함과 새로운 시작일수도 있다는 일말의 설레임이 막간 머물기도 했다. 어깨를 짓누르던 묵직한 책임감이라는 돌덩이가 떨어져 나가 일순 개운하게 느껴지기마저 했다.


특별했던 순간들은 별거아닌 일상으로 빠르게 바뀌었다.

남아도는 시간을 그저 흘러간 영화를 보거나 미루었던 독서로 소일했다. 적성이라고 해도 좋을만큼 평화롭고 만족스러운 순간들이었다.


쓸 일 없는 싱크대엔 빈 맥주캔이 쌓여가고 채울 일 없는 냉장고는 빈 몸뚱이로 전기만 축 냈다. 쓸지않고 닦지 않은 바닥에는 켜켜이 먼지가 쌓여 걸음을 낼 때마다 버석버석 거렸다. 계절이 지나도 새 옷을 꺼낼 필요를 못 느꼈고 이내 그마저 짐으로 느껴지니 멀쩡한 옷들을 봉투에 담아 내다 버리기 일쑤였다.


 너의 빈자리를 대신 채운 그 것들을 나는 자유로운 방황이라 부르곤 했다.


언젠가 이 방황이 끝난다면 나는 다시 사랑을 할 것이라 생각했다. 건방지게도 나는 그 무렵이 되면 이전보단 좀 더 나은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는데 그게 얼마나 얼 빠진 생각이고 가당치도 않은 착각이었는지를 새삼 깨닫는 요즘이다.


긴 시간 너라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좋은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매 순간 나를 보며 웃는 너를 볼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재미있는 사람이라서가 아니었다. 울음 없는 너의 눈물을 내가 닦아줄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자상하고 이해심 많은 사람이라서가 절대 아니었다.


나는 운 좋게도 너란 사람을 만났기 때문에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었고 어떤 순간에도 미소를 보여주려 애썼던 너의 옆에 있었기에 항상 재미있는 사람이었으며 삼키던 울음이 눈물로 비져나왔던 슬픔을 깊이 알려 하지 않았음에도 불평하지 않던 너였기에 나는 자상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그런 너에게 비겁한 변명으로 일관하며 이별을 고하고 내가 얻은 것이라곤 나이 몇 살과 너저분한 싱크대가 전부인 것이다. 세상 다신 없을 사랑과 맞바꾼 것이 고작 찌그러진 맥주캔 더미와 쌓여있는 담배꽁초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가지 잘 한 것은 그 아픔과 상처가 무뎌지고 희미해져 더이상 아프지 않을 너에게 이 비루한 인간을 겪음으로 인해 더 좋은 사람을 볼 수 있는 관록을 심어 준 것 정도일까.


부디 진실로 원컨대, 사랑을 사랑답게 할 줄 아는 성숙한 사람 곁에서 때로 슬프고 가끔 서글프고 더러 힘들지만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가길.


내일은 방 청소 하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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