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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필소년 Nov 02.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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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날씨가 제법 쌀쌀해졌습니다. 바야흐로 완연한 가을이고 이제 곧 겨울이 오겠죠.


언제나 그랬듯 제겐 별다른 일들이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내심 기다리고 계실 연애 소식은 올해도 역시 전해드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제 그런 건 기대도 안 한다고 너스레를 떠시면서도 네가 옷을 안 사 입어서 그렇다며 저 모르게 넣어주신 옷값을 확인했을 때 심히 당황스러웠습니다. 저는 한창 연애를 할 때에도 제대로 된 옷을 사 입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네. 제가 바로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그 패션 고자입니다. 면밀히 따져보면 아버지 탓이기도 합니다. 물려주신 유전자 중에 딱 그것만 누락이 된 것 같아요. 그래도 마흔에 접어들어 받아보는 아버지의 협박성 용돈이 저는 싫지가 않습니다. 아.. 아직도 나는 누군가에게 기대감을 주고 걱정을 끼치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내심 싫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집 근처에서 붕어빵을 샀습니다.

하필, 늦은 오후의 회색 햇빛과 함께 부딪쳐오는 찬바람 탓이었을 겁니다. 매일같이 고민해야 하는 끼니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한입 베어 물었을 때의 탄 밀가루 맛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혀가 빠질 것 같은 팥 크림의 단 맛도 오늘만큼은 썩 좋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올 가을 들어 가장 만족스러운 저녁식사였습니다. 심지어 집으로 오르는 작은 언덕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 먹을 수 있어 시간마저 아낄 수 있다니 별점 5점이 아깝지 않았죠.


제가 사는 건물의 입구부터 제 집까지는 총 여섯 개의 센서등이 있더군요. 공동 현관에 하나 중간 계단에 하나 2층 입구에 하나 또 중간 계단에 하나 3층 입구에 하나 그리고 마지막으로 집 앞에 하나.. 신경 써 본 적이 없는데 무슨 바람이 불어서인지 오늘은 개수를 세어 보았습니다. 따뜻한 전구색 불 빛이 제게 잘 돌아왔다고 말해주는 듯 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안으로 들어오니 따순 기운이 훅 하고 밀려왔습니다. 온종일 밖에 있어 굳었던 몸이 녹아내렸습니다. 아늑하달까.. 포근하달까.. 이런 간질간질한 단어를 써 본적이 오랜지라 뭔가 머쓱하네요. 아무튼 그런 느낌적인 느낌이었어요.


계획에 없던 청소를 해 버렸습니다. 청소기를 돌리고 싱크대를 비우고 욕실 곳곳에 낀 물때를 닦아내고 락스를 뿌려주었습니다. 세탁조 청소를 하고 베란다에 1년 내도록 켜켜이 쌓인 먼지를 닦아냈습니다. 이불을 털고 안 입는 옷을 리빙박스에 담았습니다. 책상 위를 닦을 때는 입 닦을 때나 쓰던 물티슈를 꺼내 사치 부리듯 폭폭 뽑아 구석구석 닦아냈습니다. 샤워를 하고는 일전에 사두었던 스탠드를 켰습니다. 어둑한 방안으로 은은하게 퍼져 나오는 스탠드 불빛은 조금 청승맞으면서도 아늑했습니다.


술을 마시지도 않았는데 돈을 펑펑 쓰지도 않았는데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저녁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는 말이 이런 뜻이었을까요. 무수하게 지나쳐온 시간들과 구분도 되지 않을 만큼 평이한 오늘이었는데 말입니다. 오늘 제가  어떤 걱정을 했고 누구를 미워했고 얼마나 한숨을 쉬었는지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정말입니다.

그저 이 순간이 좋았습니다.

과거의 좋았던 기억들을 꺼내어 그리워하지도 시샘하지도 않았습니다. 어떤 그럴듯한 미래도 상상하지 않았습니다. 오롯이 이 시간 속의 저를 느꼈고 또 뒤로 흘려보냈습니다.


왜, 어떻게 된 건지는 도무지 알 길이 없지만, 아버지.


그렇게 저는

영문도 모른 체로

얼마간을 더 살아낼 수 있을 만큼의 위로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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