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키득대고 웃고 있을 그 자식을 생각하니 마음 같아서는 주먹으로 면상을 쳐주고 싶었다. ‘설마 초등학교 다니는 남학생이 좋아하는 여자애를 괴롭히는 것처럼 자신을 미화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단단히 돌았군.’ 이것은 명백한 범죄였다.
태연한 척 자리로 돌아갔으나 윤영은 남은 시간을 전혀 업무에 집중할 수 없었다. ‘일이 이렇게 손에 안 잡혀서야. 원.’ 윤영의 시간만 아까 수화기 너머로 스토커의 음성을 들었던 시점에서 멈췄다. 하지만 시계의 초침은 규칙적으로 계속 나아갔고 다람쥐 쳇바퀴 돌듯 퇴근 시간이 다가왔다. 업무일지를 어떻게 썼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윤영은 일과를 마무리했다.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은 분명했지만 이딴 일을 도대체 누구한테 도움을 청해야 할지 난감했다.
늘 타던 지하철 방향을 윤영은 잘못 탔고, 귀가하기까지 평소보다 시간이 배로 들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코너를 돌아 윤영의 집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토록 좋아했던 집에 들어가는 게 이렇게 곤혹스럽게 느껴지긴 처음이었다. ‘보금자리 같던 집인데, 이젠 저 집에 들어가야 한다는 게 저주스럽게 느껴진다.’
“하….” 한숨이 절로 났다. 차라리 이렇게 해서 땅이 꺼지고 지구가 종말 해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 앞으로 하루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도, 이 상황을 어떻게 종료 시켜 다시 일상을 되찾을지도 판단이 안 섰다. 대문을 지나 계단을 오르며 현관으로 향하는 걸음이 천근만근이었다. ‘차라리 연예인이면 매니저며, 보디가드며, 든든한 소속사라도 있지. 이게 뭐람.’ 삐-비비. 도어락을 열고 집으로 들어섰다. 윤영은 자동 도어락 잠금은 물론 안전고리에다 열쇠로 여는 문고리까지 삼중으로 잠갔다.
창문이 모두 닫혀 있는지 확인하고 잠금장치도 걸었다. 도톰한 암막 커튼도 치고 따뜻한 전구색 스탠드 조명을 벽으로 쳐서 간접조명 효과를 냈다. 윤영은 자취방을 최대한 은은하고 따뜻한 분위기로 연출했다. 그나마 익숙한 디퓨저 향기마저 코끝을 자극하자 불안으로 가득 찼던 마음이 아주 조금이나마 놓였다. ‘참, 사람의 취향은 어쩔 수가 없구나. 그래, 여전히 불안하지만 따뜻한 물에 샤워하면 놀란 마음이 더 진정될 거야.’
욕실에 들어가 샤워할 준비를 하던 윤영은 한바탕 비명을 질렀다. “이런, 씨발….” 윤영은 가장 좋아하는 엔디 위어의 소설 ‘마션’의 첫 도입부를 떠올렸다.
‘아무래도 좆됐다. 그것이 내가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론이다. 나는 좆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