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벌써 금요일이야. 요즘 나는 ‘벌써!’라는 말을 달고 살아. 이렇게 시간이 금방 지날 때면 내가 뭔가 놓치고 있는 건 아닌지 두리번거리게 돼.
시간이라는 게 신기하지 않아? 때로는 시간보다 한참 앞서가는 것 같기도 하고, 때로는 시간을 허겁지겁 뒤쫓는 것 같기도 하고, 때로는 시간과 발맞추어가는 것 같기도 해. 너는 지금 어떤 시기를 살고 있니?
나는 너를 이해하고 싶어서 요즘 너의 생활기록부를 찬찬히 읽고 있어. 내가 모르는 너의 이야기가 신기해. 가만히 따라가다가 ‘진로희망 없음’이라는 글자 앞에서 문득문득 시선이 멈춰. 어쩔 수 없이 아쉬워져. 진로희망은 해마다 기록되는 것이고, 올해의 네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기록해두면 미래의 너에게 도움이 될 텐데 말이야.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진로목표’가 아니라 ‘진로희망’이잖아. 목표가 ‘저 멀리 있는 확고한 도달점’이라면 희망은 ‘지금 여기’에 있는 거야. 내가 지금 여기에서 발견한 막연한 꿈, 그토록 가까이 있는 게 바로 희망이야. 목표를 성취한다고 하지만 희망을 성취한다고 하지는 않잖아. 단지 품으면 돼. 품다 보면 닮게 될 테니까.
너의 생활기록부를 읽다가 오랜만에 나의 중학교 생활기록부를 들췄어. 요즘엔 학생 진로희망만 적는데 내가 학교 다니던 시절에는 학생 진로희망과 학부모 진로희망이 모두 기록되더라. 나는 나의 진로희망에 놀라. 교사라는 직업을 꽤 나중에야 정했다고 생각했거든.
나의 학생 진로희망 칸에는 중학교 1학년에 작가, 2학년과 3학년에 교사라고 적혀 있어. 그리고 학부모 진로희망 칸에는 우직하게 1, 2, 3학년 모두 한의사라고 적혀 있지. 담임 선생님께서 적어주신 특기사항에는 ‘부모님과 많은 대화를 나누도록 권고’라고 쓰여있어.
학부모 진로희망의 진득한 한의사란 단어에 지금은 웃을 수 있어. 그 확고한 학부모 진로희망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국 교사가 되었구나, 놀랍기도 하고 조금은 안도감이 들기도 해.
그렇다고 교사라는 방향으로 줄곧 나아갔던 건 아니야. 나는 대학을 국어교육학과가 아닌 국어국문학과로 갔어(수업 중에 말했다시피 국어교육학과는 중고등학교 국어 과목을 잘 가르치는 방법을 배우는 학과고, 국어국문학과는 우리나라 어법과 문학을 학문적으로 깊이 배우는 학과야). 대학을 졸업한 후엔 교사와 전혀 다른 일을 했어. 심지어 먼 타국에서 살다 오기도 했지. 자주 ‘하고 싶은 것’과 ‘잘하는 것’과 ‘할 수 있는 것’ 사이에서 고민했고, 몇 번의 갈림길을 만났고, 작고 큰 여러 번의 선택 끝에 나는 오늘 중학교 2학년 때 희망한 교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어.
그러나 나의 진로희망은 끝나지 않았어. 작가를 꿈꾸던 중학교 1학년의 시간이 내 속에 남아 있거든. 나는 소설을 쓰고 싶어. 교사에 도달하기까지 직진이 아니었던 것처럼, 막연하지만 언젠가는 닮게 될 거라고 믿어. 곧게 뻗은 길은 아니겠지만 대신 더 다채로운 풍경을 볼 수 있겠지.
희망은 아무래도 ‘더 나은 나’, 적어도 ‘내가 바라는 나’일 테고 나는 우리 모두가 ‘내가 바라는 나’를 꿈꿨으면 좋겠어.
네 앞에는, 그리고 내 앞에는 어떤 풍경이 펼쳐질까. 자, 오늘도 무척 반가웠어!
추신.
나는 지금 행복해. 국어 수업을 마치고 진우가 다가와 “『메밀꽃 필 무렵』을 읽고 있어요.”라고 얘기했을 때, 수업 시간에 잠깐 언급한 그 소설을 네가 기억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 행복해. 은비, 진서가 “운율이 잘 드러나는 노래예요”라며 추천한 방탄소년단의 <Young Forever>를 같이 듣는 시간이 행복해.
지금 돌이켜보면 진로희망을 ‘직업명’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로 생각해보는 게 중요한 것 같아. 나는 아무래도 교사라서 행복한 게 아니라 너와 내가 좋아하는 것을 공유하는 사이라는 게 행복하거든. (물론 내가 좋아하는 건 국어 과목이지!) 내가 지금 진로희망을 쓴다면 ‘좋아하는 것을 공유하는 사람’이라고 쓸 것 같아.
너는 무엇을 공유하고 싶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