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합격 발표가 나고 발령받기 전이다. 합격만 하면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막상 교탁 앞에 서려니 막막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사소하게는 아이들에게 존댓말을 써야 하는지부터 크게는 어떤 철학을 지녀야 하는지까지 전부가 의문투성이였다. 머릿속에 온갖 경우의 수가 떠올랐고 상상 속에서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검색창에 모교 이름을 검색했다. 대표 번호로 전화해서 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 선생님 번호를 여쭸다. 한참을 망설이고도 또다시 머뭇거리다가 문자 한 통을 보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 한 10년 전쯤에 졸업한 학생인데요.”
선생님께선 이름을 묻더니 학교로 오라고 하셨다. 학교는 높은 오르막과 ‘건실한 생활인이 되자’라는 현판, 급식실까지 점심시간과 저녁 시간마다 뛰어가 길게 줄을 늘어섰던 길, 그리고 교무실 문을 열자 “어, 왔니?”라고 묻는 선생님 모두 그대로였다.
막상 찾아왔지만 너무 오랜만이라 어색했다. 각종 입시와 진로진학 자료가 빼곡한 교무실에 마주 앉아 임용시험 2차 면접에서 “기억에 남는 선생님과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을 받았다고, 그때 선생님이 떠올랐다고 말씀드렸다. 다른 학교로 가신 선생님들이나 직급이 바뀐 선생님 근황을 들었다. 학창 시절 칭찬받았거나 혼났던 일들을 웃으며 추억하다가 서운했던 일들을 말씀드리기도 했다. “내가 잘못했구나.”라고 말씀하시는 선생님 앞에서 교직 생활에 궁금한 것들과 걱정하는 것들을 여쭤볼 용기를 냈다. 정리되지 않은 질문이 맥락 없이 떠오르는데도 선생님께선 같이 진지하게 고민하셨다.
“선생님, 저는 제 경험에 한정되어 판단할 수밖에 없잖아요. 저도 이제 나이를 좀 먹었다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으면 계산기를 두드려보고 ‘현실적으로 터무니없어’라는 생각부터 들 때가 많아요. 그런데 제가 너무 현실 운운하는 꼰대처럼 보일까봐, 저도 별반 다르지 않은 어른이라고 생각할까봐 무조건 그 꿈을 응원한다고, 열심히 해보라고 격려하면 속으로 ‘이게 맞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상담할 때 학생의 꿈을 어디까지 응원해줄 수 있을까요?”
“고민을 많이 했구나. 정답은 아니지만 내 생각을 말해보자면, 교사는 정답을 말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야.
현재의 상황에서 그 선택을 했을 때 학생에게 닥칠 수 있는 상황과 해야 하는 노력을 말해줘야겠지. 그리고 반드시 덧붙여주어야 해. 그 학생이 사회로 뛰어들 때는 5년 후, 또는 10년 후고, 그때는 지금과 세상이 달라져 있을 수 있다고 말이야. 그렇게 가능성과 불확실성을 바탕으로 판단과 선택은 학생이 스스로 하는 거야.
교사는 무엇을, 왜, 어떻게, 언제와 같은 질문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단다. 학생의 대답을 듣고, 질문을 잇고, 학생이 자신의 대답을 바탕으로 스스로 선택한 결정을 존중해주어야지. 인생이란 자기가 선택해야 재미있는 거 아니겠니?”
“선생님, 그래도요, 교사는 학생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어야 하지 않나요? 어떻게 하면 학생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을까요?”
선생님께선 재미있다는 듯 웃으셨다. 학창 시절에 마주쳤던 웃음이었다. 선생님이 그 웃음을 지을 때면 다음 순간이 기다려졌다. 교과서를 덮고 선생님이 본 영화나 책 이야기, 뉴스에 나온 사건이나 친구와의 일화가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나는 내 앞에 있지도 않은 교과서를 덮은 기분이었다.
“타인에게 영향을 주려고 마음먹고 영향을 줄 수는 없단다. ‘나는 이런 영향을 주겠다.’라는 목적을 가지고 네 뜻대로 고스란히 영향을 끼칠 수는 없는 거야. 그건 영향이 아니라 조종이지. 같은 말이 누구에게나 영향을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예를 들어 나는 4.19나 5.18, 6.10 또는 한글날 같은 날에 그 의미를 말해주는 걸 중요하게 생각해. 간단하게라도 꼭 짚고 넘어가려고 하지. 그 말을 어떤 학생은 지겹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어떤 학생에겐 새로운 시작의 계기가 될 수도 있지. 너는 그로부터 몇 년 후에 그 이야기를 임용시험 면접에서 했고 말이야. 내가 예상할 수 있었겠니? 예상치 못해서 지금 더 기쁜 거지.
교사는 수업 시간, 조회 시간, 쉬는 시간, 청소 시간, 매시간 최선을 다할 뿐이야. 그리고 그 말이 학생의 상황과 조건과 기분 같은 코드가 맞을 때, 우연히 영향을 주게 되는 거야. 그러니까 영향을 주었다 못 주었다가 기준이 되면 어려워져. 타인에게 기준을 두는 거니까. 자신에게 기준을 두고 최선을 다했냐 다하지 않았냐를 스스로 살펴야지.”
놀라웠다. 선생님은 그냥 선생님인 줄만 알았지 이렇게 많은 생각과 실천을 하고 계시는 줄 몰랐다. 나는 이미 어른인 줄 알았는데, 어른이 되려면 더 많은 고민이 필요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제일 궁금했던 질문을 말씀드렸다. 교실에서 한 명의 교사가 서른 명의 학생을 포기하지 않는 버거움에 대한 의문이었다.
“선생님, 근데 수업 시간에 아이들이 자면 어떡해요? 제가 면접할 때 달달 외운 문장이 ‘단 한 명도 포기하지 않는 교육’이거든요. 근데 자는 애들을 그냥 놔두면 포기하는 거잖아요.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그러면 일일이 깨워서 입씨름해야 할까요?”
“수업 시간에 한 명도 자지 않고 모든 학생이 집중해서 듣는 건 정말 꿈같은 일이지. 생각만 해도 설레는구나. 가장 좋은 대답은 모든 학생이 깨어날 만한 재미있는 수업을 마련하는 거겠지.
그런데 말이지, 단 한 명도 포기하지 않는다는 건 나의 수업을 아이들이 말씨 한 톨 놓치지 않고 들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고 생각되는구나. 가만히 앉아서 수업을 잘 듣도록 한다는 게 아니라 그 아이의 인생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뜻이지. 학생이 자면 조용히 불러 그 학생의 사정을 듣고 그 학생 인생에서 우선순위를 함께 고민해주는 거야. 아르바이트 때문인지 게임 때문인지 아니면 그냥 수업이 듣기 싫은 건지 얘기해보는 거지. 그 학생에게 내 수업을 듣는 게 무조건적으로 1순위가 되어야 한다고 강요할 수는 없어.”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덧 시간이 한 시간을 훌쩍 넘겼고 마지막 인사를 하며 말씀드렸다.
“선생님, 오늘 시간 내어주셔서 감사해요. 너무 오랜만이기도 하고 기억 못 하실 것 같아서 찾아오기 망설여졌었거든요.”
선생님께선 싱긋 웃으시더니 말씀하셨다.
“너는 참 반짝이는 학생이었단다.”
꾸벅 인사드리곤 교무실 문을 닫았다. 익숙한 나무 미닫이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은사님과의 대화는 오래 여운이 남았다. ‘어떤 교사가 될까’, ‘교육이란 무엇일까’라는 추상적인 질문에서 나아가 ‘나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나는 어떤 것을 알려줄 수 있을까’와 같이 구체적인 것들을 고민하게 되었다.
비교교육학자 김선의 저서 『교육의 차이』에서는 교육을 ‘자신을 찾아가는 여행’으로 정의한다. 즉, 교육은 지금 나의 모습이 아직 끝이 아니라 과정(on process)이라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밑줄을 진하게 그었다. 바로 그 사실을 알려주고 싶다. 지금의 나는 지금의 나일 뿐 어디로든 나아갈 수 있다는 것, 하나의 선택으로 인생이 결정되고 끝나는 게 아니라 선택은 다음 선택으로 또 이어진다는 것, 이 과정은 죽을 때까지 반복되므로 언제든 선택을 하면 된다는 것.
그리고 언젠가 나의 이 중학생들이 어른이 되어 찾아오면 말해줘야지. 수업 시간에 창밖을 바라보던 너, 발표하던 너, 수행평가 준비를 노트에 빽빽이 쓰던 너, 책상에 엎드려서 자던 너, 시험이 끝났다고 환호하던 너, 급식 식단표의 맛있는 음식에 형광펜을 칠하던 너, 웃던 너, 울던 너, 꾸벅 인사하던 너.
“너는 참 반짝이는 학생이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