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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빚

2025. 06.

by 디미드

누구에게나 드러내지 못한, 들려주지 못한 누군가에 대한 마음의 빚이 있지 않을까. 더 시간이 지나기 전에 이렇게라도 하나씩 꺼내놓아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대학교 졸업반이 코앞까지 다가왔던 2015년 겨울, 평균 3.5점도 안 되는 학점으로는 원하는 회사는커녕 이력서조차 쓰지 못하겠다고 생각했다. 뭐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에 대외 활동 사이트를 뒤지다 공고 하나를 발견했다.


현대자동차에서 진행하는 멘토링 프로그램 ‘세잎클로버 찾기’. 세잎클로버의 꽃말이 행복이라는데 착안해, 교통사고 유자녀들의 행복을 찾아준다는 의미에서 시작된 프로그램이다. 전공과 관련된 대외 활동도 많이 있었지만, 이유 없이 세잎클로버 찾기 프로그램 지원서에 자꾸 손이 갔다. 해야 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 사이의 고민으로 며칠을 버티다 공고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결국 지원했다.


며칠 뒤 현대자동차로부터 합격 통보와 함께 면접 안내 문자가 왔다. 평소와 다름없는 차림으로 별생각 없이 강남의 어느 건물 면접장에 도착해서야 내가 처한 상황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회사의 면접을 보듯 정장을 입고 대기하고 있던 수많은 대학생들과 내 손에 쥐어진 번호표와 명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규모가 컸던 프로그램이었고, 다들 하나같이 손에 종이를 들고 예상 질문에 대답하듯 바쁜 모습이었다. 면접장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던 하루가 지나고 다음 날 바로 합격 전화가 왔다. 프로그램이 끝나갈 때쯤에야 알게 된 면접 합격 이유는 그 수많은 지원자 중에 영상 멘토로 신청한 사람이 나뿐이었다는 것. 정말 운칠기삼이었다.


“안녕하세요. 멘토님. 세잎클로버 찾기 멘토링 담당자 000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꼭 영상 쪽으로 멘토링을 꼭 하고 싶다는 학생이 있어서요. 근데… 학생이 사는 곳이 경남 진주라...”

“아…저는 괜찮습니다! 다만, 매번 진주로 내려가서 멘토링을 진행해야 하는 건가요?”

“10번 중에 5번은 학생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진행하셔야 해요. 엄청 밝은 학생이니 하림 님과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진주는 내가 그린 계획에서 많이 벗어나 있긴 했지만, 못한다고 말할 이유가 없었다. 합격까지한 만큼 열심히 해보자는 마음으로 멘티 학생의 연락처를 받자마자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혹시 안수 학생 번호가 맞나요?”

“제가 정안수입니다. 누구세요?”

“안녕! 나는 이번에 세잎클로버 찾기 프로그램 멘토를 맞게 된 박하림이라고 해!”

“아, 네… 잘 부탁드립니다.”


다소 무덤덤한 반응에 다음 주 진주에서 보자는 말만 하고 끊었다. 내 앞가림도 못하던 대학생이었지만, 누군가의 멘토가 된다는 사실이 마냥 좋기만 했다. 10번의 멘토링 계획을 꼼꼼히 세워 안수에게 좋은 기억을 남기고 싶었다.


첫 만남 날, KTX로 진주역에 내리자마자 먼저 도착했다는 안수의 문자를 보고 서둘러 택시를 잡아 어느 카페로 향했다. 문을 여는 순간 나와 눈이 마주친 그가 안수라는 것을 직감했다. 내 두 배쯤 되어 보이는 덩치와 달리 수줍게 인사하던 모습. A4용지 몇 장을 꺼내 허겁지겁 말하던 내 모습에 그는 피식 웃더니 조금씩 경계를 풀기 시작했다. 개인적인 사정부터 좋아하는 취미까지. 우리는 꽤나 오랜 시간을 떠들었다. 왜 영상 멘토를 선택했냐는 질문에 별다른 이유는 없고, 그냥 재밌을 것 같아서 신청했다고 말하던 그의 말에 며칠을 열심히 준비한 내 자료들은 무용지물이 되었지만 말이다.


"우리 시간도 많은데 코인 노래방이나 갈까?"

"완전 좋아요! 여기 바로 앞에 있는데 가요!"


2시간 가까이 열창을 하고 밖으로 나온 우리는 남은 만남을 모두 재밌는 일로 채워가기로 했다.


“형, 저 아직 못 해본 게 많아요. 서울도 안 가봤고…”

“그럼 다음엔 서울에서 보자. 뭐 하고 싶어?”

“연극도 보고 싶고, 옛날 교복도 입어보고 싶고, 박물관도, 맛집도, 민속촌도…”

“생각보다 많네? 그럼, 대학로부터 가자.”


혜화에서 연극 보기를 시작으로, 서울과 진주를 오가며 우리는 재밌는 것들을 하러 돌아다녔다. 중간중간 세잎클로버 운영팀으로부터 놀러만 다니는 것 같다는 핀잔을 듣기도 했지만,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대체된 나의 멘토링 계획에 안수는 아주 만족해했다.


세잎클로버 찾기 프로그램이 우리에게 주었던 만남 횟수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나는 원하던 방송국에 취업했다. 너무 좋은 소식이었지만, 합격과 함께 바로 출근해야 했던 당시 상황. 이것저것 먼저 해결해야 할 것들이 많았던 시기였다. 멘토링에 대해 며칠을 고민하다가 결국 세잎클로버 운영팀에 연락했다.


"담당자님, 저 안수 멘토 박하림인데요. 제가 취업을 했어요. 더 이상,,,"

“아 하림 씨! 안 그래도 오늘 연락하려고 했는데, 안수 학생 아버님한테 전화가 갔었어요. 안수가 하림 씨를 만나고 나서 눈에 띄게 밝아졌다고 하시네요.

"아... 그래요...?"

"사실 안수는 작년에도 이 프로그램에 참여했었는데, 감정 기복이 심해서 그 때 같이하던 멘토 분이 많이 힘들어했거든요. 혹시 그것 때문에 전화하신 건가요?"

"아뇨! 안수와 멘토링이 세 번 정도 남았는데 서울에서 마지막 멘토링을 진행해도 되는지 여쭤보려고요. 별일 없습니다."


다급하게 전화를 끊고 나서 쉽게 포기하려고 했던 내가 너무 부끄러웠다. 먼저 놓아버리려 했던 안수에게도 이 프로그램을 만들고 또 같이 노력하고 있을 많은 사람들에게도.


바빠진 일상 속에서 나는 안수와의 만남을 행복이라 생각하기로 했고, 곧 20살이 될 안수는 서울이라는 새로운 세상을 알아가는 것이 즐겁다고 했다. 서로에 대해 이제 많이 가까워졌다고 생각할 즈음 멘토링도, 겨울도 끝나가고 있었다. 놀이공원이나 번지점프 같은 다이나믹한 것들을 예상하며 마지막 만남에서 무얼 할지 안수에게 물었다.


"저 형이랑 향초 만들어보고 싶어요."

"남자끼리 무슨 향초야. 롯데월드는 어때?"

"아뇨. 형, 향초요."


단호한 그의 말에 어쩔 수 없이 성수동의 한 공방 원데이클래스를 예약했다. 서울역에서 만나 같이 지하철을 타고 가는 동안 창문 밖으로 보이는 한강을 보며 억지로 분위기를 띄워보려던 안수와 애써 웃어 보이던 나. 마지막이라는 게 조금씩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공방에 도착해 우리는 각자 만들고 싶은 캔들의 모양과 향을 골랐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진한 우드 향을, 안수는 여름처럼 시원한 향을 골라 미리 고른 원하던 모양에 맞게 만들기 시작했다. 예쁘게 포장을 마치고 공방에서 나왔을 때 안수는 나에게 자신이 만든 향초를 건넸다.


"형, 요즘 많이 바쁘죠?"

"아니, 왜?"

"그냥요. 느낌이랄까. 제가 형한테 뭘 해준 게 없더라고요. 형한테 잘 어울릴 것 같은 향으로 골랐어요."


점점 만나는 날의 공백이 길어졌던 과정에서 안수는 이미 내 상황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안수를 서울역으로 바래다주는 길. 우리는 평소처럼 웃고 떠들진 않았지만 서로 눈빛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었다. 아쉬움 가득한 안수의 얼굴을 보니 괜히 걱정이 밀려왔다. 만나는 동안 재밌는 것만 보여준 건 아닐까. 시간이 지나 세상을 더 알게 되면 나를 탓하지는 않을까. 기차에 안수가 무사히 올라타고 나서야 씁쓸해진 기분을 내려놓고 돌아섰다. '그동안 고마웠어. 또 보자'라는 문자를 끝으로 10번의 세잎클로버 멘토링은 끝이 났고, 나는 신촌으로 안수는 진주로 내려갔다.


9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는 만나지 못했다. 아니, 만나지 않았다는 표현이 맞겠다. 나는 안수 인생의 이정표가 되고 싶지 않았고, 그가 만날 새로운 세상을 멀리서 응원한다는 핑계를 계속 대면서 그를 멀리했다. 당시 20대 중반이었던 나는 세잎클로버 프로그램을 통해 누군가의 멘토가 되기엔 아직 너무 작고 초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덕분인지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은 꽤나 몸집이 커진 것 같기도.


조연출을 하며 열심히 방송국을 뛰어다닐 때도, 한국을 떠나 호주에 있을 때도 종종 안수로부터 연락이 왔었다. 이제는 세잎클로버 프로그램 멘토를 하던 나보다 나이가 더 많아진 안수.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군대는 갔다 왔는지, 여자친구는 생겼는지, 이제는 하고 싶은 것이 생겼는지. 마음의 빚처럼 담아놨던 안수가 아직까지 내 연락을 기다리고 있을진 모르겠지만 혹시나 마음에 오늘은 꼭 문자라도 보내야 할 것 같다.


“안수야, 잘 지내? 오랜만이다.”


9. 마음의 빚.jpg 2016년 7월 세잎클로버 찾기 멘토링캠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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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목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