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07.
평소 잘 입지 않는 정장 바지와 흰 셔츠를 찾느라 분주했던 아침. 차에 타자마자 셔츠에 커피를 조금 흘린 것 빼고는 꽤나 근사한 하루를 보냈다.
오전에는 6월에 있었던 천안시 한 행사의 유공자로 선정되어 시청에서 시장상을 받았고, 오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동료들의 축하와 몇 달을 끙끙 앓았던 8월 어느 공연에 대한 문제를 해결했다. 퇴근 후 내가 좋아하는 농구의 국가대표 한일전 방송을 아무 방해 없이 보는 것까지. 다가올 걱정보단 정말 뭐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지금, 끝내주는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아 책상에 앉았지만 뒤늦은 후회가 밀려오는 참이다.
‘자기 성취감(Self-Achievement)’은 개인이 자신의 능력으로 목표나 도전을 이뤄냈을 때 느끼는 만족감과 자부심을 말하는데, 심리적인 안정감을 제공하고 자신감과 자존감을 높여준다고 한다. 나에게 '자기 성취감'은 거침없던 20대를 지나 30대, 곧 다가올 40대를 살아감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단어. 자기 성취감에 취한 오늘 같은 날들 중 20대 어느 한 기억이 떠올랐다.
대학교 1학년 때 앞뒤 안 가리고 놀기만 했던 터라 1년을 꼬박 공부해도 2점대에 머물러 있던 성적표를 보고 암담했던 복학생 시절. 졸업까지 공부만 한다고 상황이 나아질 것 같진 않았다.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학기 말 A+ 받는 것 말고 더 효과적이고 파괴적인(?) 것을 찾는 것. 어느 날 학교 정문에 붙어 있던 안전행정부(현 행정안전부)의 한 공모전 포스터를 보고 마치 내가 아르키메데스가 된 듯 “유레카”를 외쳤다.
앞으로 2년 반, 졸업 전까지 10개의 공모전에 입상할 것. 목표를 정하니 주변에서 일어나는 상황과 사람들의 말이 모두 아이디어가 되었다. 뭐가 됐든 계획을 짜고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첫 번째 공모전 출품작 촬영에 필요한 학교 장비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교수님의 승인이 필요했고, 두 번째는 함께해 줄 몇 명의 팀원이 필요했다. 의외로 교수님께서는 걱정보다는 진지한 조언과 응원을 해주셨지만, 학과 특성상 팀원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매일 밤 동기들과 후배들의 술자리를 찾아가 설득하며 팀원을 모았다. 술기운에 함께 하겠다는 동기와, 관심을 보이며 도움을 주겠다는 후배 덕분에 드디어 팀을 꾸릴 수 있었다. 이렇게 본격적으로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도전할 공모전은 안전행정부에서 공개한 안전신고 캠페인송을 본인만의 색깔로 따라 부르는 영상을 만들어 제출해야 했다. 당시만 해도 유행처럼 UCC 공모전이 많았는데, 개인이나 기업에서 개최한 공모전은 수상을 해도 취업이 목표인 대학생들에게는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내가 이 공모전을 선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전 국민이 대상 공모전에서 수상하려면 남들과는 다른 기획이 필요했다. 밤늦게까지 이어지던 기획 회의에서 뚜렷한 방향이 나오지 않자, 팀원들은 하나둘 집과 자취방으로 돌아갔다. 결국 나도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동기와 술이나 마시자며 회의실을 나왔다. 자취방 근처 단골 술집 앞에 도착하자, 안에서는 얼마 전 끝난 쇼미더머니 3의 우승자 바비의 ‘가드 올리고 바운스’가 나오고 있었다.
“야, 이거다!”
“뭐가 이거야. 빨리 들어가자. 맥주 마시고 싶다.”
“다음에 먹자. 나 먼저 갈게!”
나는 자취방으로 달려가 안전신고 캠페인송 음원을 구간별로 자르고 중간에 랩을 넣을 수 있게 수정했다. 평소에도 마이크를 자취방에 가져다 놓고 노래 녹음을 하곤 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8마디 가사를 쓰고 새로운 스타일의 안전신고 캠페인송을 만들 수 있었다.
“이건 모 아니면 도 아니겠어?”
랩이 추가된 음원을 들은 팀원들은 가능성을 보고 더 많은 아이디어를 내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 불씨가 꺼지기 전에 서둘러 장소와 컨셉을 잡고 촬영을 시작했고, 이틀 만에 편집까지 끝내고 공모전에 제출할 수 있었다.
몇 주 뒤 발표된 결과, 우리는 2등인 우수상을 받았다. 그때 느꼈던 짜릿한 감정은 13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성인이 되어 처음으로 자기 성취감에 취한 순간이었으니까. 이후로는 내가 공모전에 도전할 때마다 선후배, 동기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먼저 팀원을 자처했고, 졸업 전까지 애초 목표보다 더 많은 공모전과 단편영화제에서 수상했다.
물론 늘 그런 것은 아니다. 2년 반 동안 공모전에 수상하기 위해 만들었던 영상은 50개가 넘고 수없이 많은 탈락의 고배를 마셔야 했으며, 몇 개의 직업을 거쳐온 지금까지 이런 날은 손에 꼽는다. 그래서 지금처럼 나에게 취할 수 있는 날이면 이 기분을 있는 그대로 즐기려 한다.
가끔이라도 나에게 취하는 날이 있다는 건 너무 행복한 일. 이런 날들이 있기에 나는 더 나은 날을 그릴 수 있고, 지난 일에 대한 분노와 후회를 지워버리기도, 다가올 일들에 대한 걱정을 미룰 수도 있다. 술에 취하는 것보다 나에게 취하는 게 살아가면서 여러모로 났지 않을까?
“나는ㄱr 끔 나에게 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