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08.
나는 매년 12월이 되면 메모장에 적어둔 버킷리스트를 업데이트한다. 무의식이 현실을 만든다 했던가. 사실 그런 말을 귀담아듣진 않지만, 일단은 뭐든 적어놓고 보는 성격이다.
서른이 되기 전에 내 이야기를 노래로 만들고 싶었다. 뭐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라 피아노 학원을 등록해 다니기도 하고 작곡 레슨을 받기도 했지만, 호기롭게 도전했던 처음과 달리 의욕은 쉽게 꺾여 사라졌다. 결론부터 말하면, 서른 살이 되기 전에 어느 정도 비용을 지불하고 작곡가분들의 도움을 받아 얼렁뚱땅 만든 노래 하나를 세상에 내놓았다. ‘버킷리스트를 해냈다’라는 생각보다 ‘이게 뭐야’라는 후회만 남았던 도전. 이후로도 남은 미련 때문인지 떠오르는 생각이 있으면 가사로 적어두기도 하고, 흥얼거린 멜로디를 핸드폰에 억지로 녹음해서 남겨놓기도 했다.
뜨거웠던 20대를 지나 서른은 금방 찾아왔고, 새로운 버킷리스트인 블로그를 시작했다. 읽었던 책에 관한 생각부터 유튜브에 올린 노래 부르는 영상, 다녔던 여행지까지 하고 싶었던 말을 글로 쓰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누군가 눌러주는 공감의 하트와 댓글이 새내기 블로거 시절에는 정말 신기했다. 블로그를 통해 알게 된 사람들이 하나둘씩 늘어날 즈음 눈여겨보던 어느 블로그에서 음악 프로젝트 글이 하나가 올라왔다. ‘작사가 추월차선'은 만들어진 곡에 직접 작사해서 건네면 몇 번의 수정을 걸쳐 음원으로 발매되는 프로젝트였는데, 내 이야기를 다시 한번 노래로 만들 수 있다는 기대감에 진심을 꾹꾹 담아 신청 댓글을 달았다.
"안내 전문을 보내드립니다. 이미 곡을 발매하신 경험이 있으셔서, 필요하실까 싶긴 한데요..."
"저를 선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프로젝트가 너무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아요."
주로 메신저로 음악과 가사를 주고받는 작업을 하면서 나와 대화의 결이 비슷한 이 블로거가 어떤 사람인지 점점 궁금해졌다.
"혹시 어디 사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저는 인천에 살고 있어요."
"우리 한번 만날까요?"
다짜고짜 작업실이 있는 인천까지 찾아가 만난 블로거는, 메신저를 통해 상상하던 나이보다 훨씬 어렸고, 만난 지 몇 분 만에 ‘보기 드문 멋진 사람이다’라는 감탄이 나왔다. 20대 남은 청춘을 하루도 허투루 보내지 않을 것 같은 그의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지난날 내가 도전해 보고 싶었던 일들을 거침없이 실행하고 있는 그가 부럽기도 하고, 앞으로 닥쳐올 이런저런 문제들에 넘어져 실망하지 않을까 하는 괜한 걱정이 들기도 했다.
시시콜콜한 얘기부터 음악 이야기, 앞으로 그리는 미래까지 그와 몇 시간을 떠들고 나서야 나는 천안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해보지 않은 장르의 가사를 써보고 싶다는 내 의견을 십분 반영하여 그와 만든 첫 번째 사랑 노래가 23년 여름에 완성되어 발매가 되었다.
몇 개월 뒤, 인천 출장을 가던 길에 오랜만에 그에게 연락을 했다. 영종도 외딴곳에 있던 그의 작업실에서 우리는 지난 이야기와 근황을 나누며 또 시간을 흘려보냈다.
"다음 계획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있나요?"
"작사가 추월차선을 더 많은 사람과 진행해 볼 생각이에요. 주제는 음... 꿈 어떤가요? 꿈!"
<당신의 꿈은 쓰일 가치가 있습니다>
그렇게 그와 함께한 두 번째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나를 포함해 선정된 7명의 예비 작사가는 ‘꿈’이라는 단어로 각자의 이야기를 가사로 표현하기 위해 작업을 시작했다. 과학자가 되어 달에 가고 싶었던 어린 시절부터, 농구선수가 되고 싶었던 초등학생, 역사학과에 합격을 바라던 고등학생 때, 방송국 PD가 되기 위해 아등바등하던 20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싶은 지금까지.
수없이 바뀌어온 내 꿈들 중 어느 하나를 정해 가사로 쓰는 건 쉽지 않았다. 틈날 때마다 지난 하루들을 마구 헤집으며 문장을 쓰고 지우길 반복하다가, 결국 한참 지난 일기장을 들여다보고 나서야 가사의 갈피가 잡혔다.
어디든 돌아다녀야 직성이 풀리던 내가 방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고, 모든 세상이 나를 향하는 것 같았을 때,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것은 깊은 새벽 이불을 덮으면 떠오르던 지난 기억뿐이었다. 오랜만에 외출 준비를 하고 도착한 결혼식장에서 기억 속 그리운 사람들을 하나둘 만났다. 그들은 여전히 새로운 삶에 즐겁게 적응 중인 듯 반짝이고 있었다. 주고받은 안부 덕분에, 나는 숨어있던 부끄러움을 마주하고 긴 터널을 빠져나올 용기와 결심이 생겼다. 시끄럽지도 조용하지도 않았던 하루의 끝, 그날 느낀 감정을 고스란히 일기장에 적었다.
"나의 그림"
일기장에 적어둔 문장에서 그림이라는 단어를 꺼내왔다. 노래의 제목을 정하자, 몰려오는 감정을 가사로 쓰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흥얼거리던 멜로디에 잘 맞는 단어로 가사를 수정하고, 그와 몇 차례 주고받는 수정 작업을 마쳤다. 동시에, 함께 프로젝트를 시작한 다른 작사가 6명의 꿈에 대한 이야기도 노래로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몇 달간 진행된 본격적인 녹음을 거쳐, 총 7곡이 하나의 앨범으로 이듬해 3월 발매되었다. 서로 만난 적도, 얼굴도 모르지만, 꿈이라는 주제로 다양한 이야기와 작업 과정을 나누었던 '당신의 꿈은 쓰일 가치가 있습니다'라는 특별한 프로젝트는 그렇게 끝이 났다.
지금까지 바뀌어온 꿈들은 어쩌면 연필로 그려놓은 밑그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조금씩 그림의 색깔을 채워가는 중인 것 같은 요즘, 누군가 건넸던 지난 안부도 이제야 편히 전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언제 완성될지 모르는 나의 그림을 옆에서 같이 기다려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앞으로 나아가는 데 큰 힘이 된다. 이 그림이 어떤 모습이 될지 나도 무척이나 궁금하기에, 앞으로도 많은 색을 찾아보고 칠해보고, 그림을 그리는 과정 자체를 즐기려 한다. 혹시 모르지, 새로운 그림을 처음부터 다시 그리게 될 수도.
"그래도 이제는 숨거나 도망칠 만큼 내가 물렁하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