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가고 있는데 선배 한 명이 막 아파트 입구에서 나와 회사로 발걸음을 채 촉한 것이 보였다.
차를 세우고 선배님 타세요하고 말하자 선배가 반가워하며 차에 올라탔다.
사실 선배는 올해 우리 나이로 쉰네 살로 정말 흔한 말로 만년 대리이다.
술자리에서 넋두리로 하는 말이 계원 짓만 삼십 년째라고 한탄하던 선배이다.
그러던 선배에게 기회가 왔다. 규정집을 달달 외워 집합 평가를 보던 시험방식이 시대적 조류(?)에 맞게 통신연수식의 수료과정으로 바뀌게 되어 드디어 과장 진급 자격을 취득하게 된 것이다.
아무래도 연공서열이라는 것이 있기에 자리가 몇 개 있는 과장 자리 하나쯤은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위와 본인의 기대 등이 섞여 일 년 내내 붕 뜬 기분으로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진급자 발표날 선배는 시쳇말로 보기 좋게 물을 먹었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나 오늘 후배 직원들 과장 진급 임명장을 받는 날 진급이 빨라 직급이 몇 급은 높은 후배인 내차를 차고 출근하는 속 쓰린 현실을 맞이한 것이다.(지금 와 생각해보니 그냥 치나칠 것 하는 후회가 들기도 한다)
하지만 선배는 씁쓸한 웃음을 보이고 "지금은 내가 너무 힘드니 마음 추스르고 소주나 한잔 하자"며 애써 태연한 척하였고 그날은 그렇게 나에겐 아무 의미 없이 공약 속하나 늘리며 지나간 듯했었다.
그리고 달포가 조금 더 지난 어제저녁 그 선배에게 연락이 왔다.
이제 좀 나아졌으니 그때 한 약속 지키겠다는 것이다.
내가 사야 할 소주를 선배가 굳이 사겠단다 그가 좋아하는 순댓국집에서 말이다.-굳이 이렇게 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위로받아야 할 선배를 앞에 두고 무슨 말을 해야 하나 나는 직급이 이미 몇 단계를 뛰어넘어 내년에 과장 진급을 하시더라도 이 선배는 퇴직 전에 내 직급에 오를 수도 없는 분인데 무슨 위로를 해야 하나 몸과 마음 덩달아 입까지 무거워지는 금요일 밤 순댓국집에서 그렇게 나와 선배 그리고 후배 한 명해서 셋이 모여 앉았다.
태어나고 시간이 흐르고 빠르던 조금 느리던 어느 순간 우리는 모두 삶의 짐을 하나 가득 실고 고된 걸음을 하며 살아가게 된다. 그 점이 참으로 서글프다.
입을 연 선배는 첫마디부터 그야말로 삶의 무게에 짓눌릴 것 같은 말들이었다.
진급 한 사람들보다 못한 게 무엇인가?
이제 성인이 되어 직장에 다니는 자식들에게 만년 대리 꼴이 무엇이냐?
술이 오르자 말은 점점 더 무거워 아니 거칠어진다.
거지 같은 회사 때려치운다.
명예 권고사직까지 4년 남았다. 과장 진급이 무슨 의미가 있나?
요즘은 소주를 다섯 명이나 마셔도 정신이 멀쩡하다. 진급 누락에 대한 수치심, 아쉬움, 분노 등등등의 감정이 몰려와 술 취해 정신줄 놓는 것도 어렵다.
그러다 마지막으로 희망을 이야기한다.
그래도 올해 열심히 하면 내년엔 되지 않겠느냐.
절망 속에서 마지막에 희망을 본 것은 가족에 대한 책임감과 그래도 마지막에 과장 직급으로 웃으며 가족들과 퇴임식을 하고 싶다는 그 소박한 바람 그것이 취해서 벌겋게 충혈된 눈 속에서 한줄기 햇살처럼 빛나고 있었다.
이 드라마를 볼 땐 몰랐었다 이 것이 흔한 우리네 이야기라는 것을,,,,,,
그러면서 줄줄이 가족 자랑이 나온다.
언제나 옆에서 힘이 되어주는 형수, 간호학을 전공한 두 딸 그리고 열심히 공부 중인 늦둥이 막내아들.
그렇게 금요일 밤은 깊어가고 결국 아무리 힘들어도 가족 때문에 살아가야만 하고 또 살아갈 희망을 주는 존재 가족 그것이 있기에 쓰러져도 다시금 일어나 남은 4년을 조금 더 아름답게 마무리하여 가족에게 또 다른 힘과 위로를 주고자 하는 만년 대리 선배.
선배의 힘찬 나날을 기도하며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엔 나의 가족이 있었다.
그리고 나도 마음으로 외쳐본다 힘내서 살아가자.
알베르 카뮈가 말하지 않았던 가 그 옛날 신화 속에 시지프스는 신들의 노여움을 사 하데스에게 저승에서 가장 높은 산 위에 바위를 들쳐 엎고 올라가 내려놓으면 밑으로 떨어지고 굴러 내려간 돌을 또다시 올려놓는 무한반복 극한 노동형을 선고받았던 그도 실상 돌을 올려놓고 내려올 때 가벼워진 어깨와 가끔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한 숨 돌리며 그 와중에서도 행복을 느꼈을 것이라고.
우리네 평범한 사람들도 그런 일상의 고통을 시지프스가 그 가벼운 바람으로 한시름 놓듯 그렇게 무언가 청량제 한 두 개로 위안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부조리한 삶을 사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나 역시 생각한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이자면 물론 아닌 사람도 있겠지만 그래도 대다수의 사람에게 그 가족이 저승세계 가장 높은 산을 내려올 때 부는 바람이 아니고서야 무엇이겠는가?
세상 일상에 지친 이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물론 나를 포함해서 말이다.
가족을 위해서라도 또 가족에게서 위로받을 수 있기 위해서라도 오늘에 최선을 다하는 아름다움 삶을 살아갈 것을 말이다. 힘든 우리 만년 선배대리님이 내년에 또다시 희망을 걸 수 있는 힘을 어디서 얻었는지를 떠올리며 모두 묵묵히 내일을 향해 걸어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