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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가적일상추구 Sep 02. 2021

금강경(金剛經)

정확한 이름은 금강반야바라밀경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불교 경전을 꼽으라고 한다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금강경(金剛經)일 것이다.

실제 금강경을 읽어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내가 알기론 불교신자 또는 불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조차 금강경을 읽어본 사람이 드물 정도이다.

나 역시 나이 사십이 훌쩍 넘어 읽은 것이 금강경이었다.

불교에 대해 나름 좀 안다고 생각하고 시중에 많이 나와있는 주석서를 읽지 않고 바로 금강경을 사서 읽었다.

내가 알지 못했던 개념들이 속속 나타나고 나는 적잖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일찍이 고대 중국의 철학자 노자(老子)는 말했다. 지자불언 언자부지(知者不言 言者不知)라고 알지도 못하면서 좀 안다고 금강경을 덥석 집어 들더니 하룻강아지 같은 내 모습에 '아직도 나는 멀었구나!'하는 개탄을 하게 되었다.

우선 그  금강경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금강경의 원래 이름은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고 한다. 금강하면 원래 다이아몬드가 떠오르고 나 같이 무식한 사람들은 다이아몬드처럼 고귀한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을 것이다.(나만 그럴 수도 있지만)

하여튼 그 같은 생각은 참으로 어리석은 무지의 소산이었다.

금강은 고대 인도의 번개와 벼락의 신인 제석천이 들고 다니는 무기로서 금강저로 한역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금강의 의미는 '끊다. 절단하다'라는 의미를 지니는 말이라고 한다.

금강경 하면 한마디로 '절단하는 복음' 즉 속세의 번뇌로부터 절연하여 열반에 이르는 복음이라는 뜻이 되겠다. 따라서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는 풀네임이 올바른 표현인데 반야는 '깨달음에 이루는 지혜', 바라밀은 '열반에 도달하다'라는 뜻으로 '속세의 모든 번뇌를 끊고 깨달음에 이르는 지혜로 열반에 도달한다'라는 뜻이 되겠다. 역시나 깊은 뜻이 있는 경전이다.

금강경은 석가모니가 인도 사위국을 배경으로 제자 수보리를 위하여 설한 이야기를 모은 것으로, 책의 분량은 마음먹고 읽으면 20분 내로 읽을 수 있을 정도의 아주 적은 분량이다.

하지만 이 작은 책에 대한 두꺼운 주석서가 그리도 많았을까 하는 의문은 책을 읽은 지 불과 몇 분 만에 깨닫게 되었으며 아날로그 책을 두고 노트북 검색을 쳐가며 처음 접하는 부처님 말씀을 보며 스스로를 뒤돌아 보게 되었다. 책에서도 진정한 보살과 마하살은 깨달았다는 것 자체를 알 수 없고 말할 수도 없다는 하는데 또 노자의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 )를 떠오르게 되었다.(무언가를 깨달은 사람들은 무언가를 공유하는가 보다.)

우선 이 경전에 관심이 있어 처음으로 접하고자 하는 이가 있다면 불교적 세계관을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이다.


불교적 세계관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 있다면 역시 교리와도 같은 삼법인(三法印) 설일 것이다.

이는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일체개고(一切皆苦)이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이치는 고정된 실체가 없이 만물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변화무쌍한 세계라고 한다. 그러므로  제법무아(諸法無我) 즉 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없는데도 중생들은 굳이 힘겹게 나(我)라는 실체를 추구하고 가지려 하니 일체개고(一切皆苦) 삶 자체가 고통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는 세계관이다.

이런 세상에서 세계의 참모습을 깨닫지 못하고 고통스럽게 윤회(輪廻)를 반복하는 중생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 되겠다.


나는 여기까지 생각하고 사성제(四聖諦)와 열반에 이르는 여덟 가지 방법인 팔정도(八正道)가 나올 것으로 생각했지만 금강경에서는 사상(四相)을 버리고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내용의 불교 경전이라 다시금 공부를 해야만 했다.

사상(四相)의 내용을 정리해 보고 금강경에 대한 생각을 마무리해 보겠다.

금강경은 사상(四相)을 버리고 우리가 존재하는 세계를 정확히 인지하고 인간으로서 가지는 집착을 버리고 영원한 평온으로 가는 가르침을 핵심 사상으로 하고 있다.

한마디로 인간은 실재 세상을 오온(五蘊)을 통해 자신의 만의 생각으로 걸러 보고 있는데 이것이 독일 관념론 철학의 핵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 현상계이다.

이 왜곡된 현상계로 인하여 인간은 아상(我相)·인상(人相)·중생상(衆生相)·수자상(壽者相)을 가지게 되며 집착을 하게 되고 그 집착으로 인하여 윤회의 굴레에서 영원히 고통받게 된다는 것이다.

열반에 이르기 위한 전제조건인 사상 버리기 이 사상에 대하여 조금 더 알아보자.


 아상(我相)- 제법무아(諸法無我)적인 세상에 존재함에도 나(我)를 추구함에 아집(我執)이 생기니 이것이 아상(我相)이다.


인상(人相)- 단순히 사람인(人)이 가지는 집착이 아니라 나와 다른 이를 구별해서 생기는 것으로 사람이 개체적으로 존재한다고 여겨 이기심이나 우월감 기타 등등 필요 없는 생각에 사로잡히는 것으로 이야기한다. 불교의 공(空) 적인 세계관을 단순히 비어있는 세상이 아니라 공유한다는 세계관으로 이해한다면 인상(人相)이 가지는 오류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극히 우연의 산물인 나를 다른 개체와 구별을 한다는 것은 정말로 허상일 뿐이다. 내가 죽고 나의 몸을 이루던 것들이 어디서 무엇이 될지 한 번 생각해 보자.


중생상(衆生相)-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한 이들을 일컫는 중생. 중생으로 살면서 가지는 허상을 이야기하는데 대표적으로 고대 중국의 재상 관중이 이야기한 호이오해(好利惡害)로 자신에게 좋은 것만 취하고 나쁜 것을 남에게 돌리는 마음이다. 쉽게 이야기하면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그릇된 생각들의 총합을 중생상(衆生相)이라고 한다.


수자상(壽者相)- 오온의 잘못된 작용으로 인간이 영혼, 목숨, 생명을 가지고 있어 설사 죽더라도 불멸의 영혼으로 존재한다는 잘못된 믿음이 수자상(壽者相)이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세계에 사는 우리는 오온(五蘊)이라는 아주 주관적이며 편협한 감각으로 공(空)의 세계를 잘못된 사상(四相)의 현상계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금(金) 물이 흐르는 강에 가서 맨몸으로 금을 마음껏 퍼가된 단 입으로 마셔가도 안되고 손을 오므려 퍼가지도 말라는 두 가지 조건을 내건 것과 무엇이 다른가?

가질 수 없는 세상에서 가지려 몸부림치니 이 세상 죽어 어디서 무엇이 되든 그 마음이 서려있으면 또다시 번뇌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는 불경이 바로 이 금강반야바라밀경이다.

초심자의 경우 주석서로 읽을 것을 권하는 바이다.

심오한 불교철학을 너무 짧은 경어로 알듯 말듯 이야기한 부분이 불교에 대한 관심을 바로 접어 버릴 수도 있기에 쉬운 주석서로 그 위대한 가르침을 천천히 배우는 것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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