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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가적일상추구 Sep 03. 2021

싯다르타- 헤르만 헤세

삶을 관조할 수 있는 지혜란?

헤르만 헤세의 1922년 출간인 '싯다르타' 이 책 역시 아주 오래전에 읽었지만 기억나는 건 싯다르타가 강가에서 깨달음을 얻는 이야기 정도만 기억날 뿐이다.

그리고 이상하게 '싯다르타'의 이야기가 부처님의 원래의 이름이었던 '고타마 싯다르타'의 전기적 이야기처럼 기억에 남아있어 그 기억의 확인차 읽어보기로 하였다.

그럼 헤르만 헤세의 명작으로 꼽히는 '싯다르타'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제목이 '싯다르타'이기에 우리가 아는 부처님의 본명인 고타마 싯다르타의 전기적 소설이 아닐까 하는 하는 합리적 선입견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여겨지고 나 역시 일독(一讀)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게 놀라울 정도로 이 소설은 '고타마 싯다르타'의 생이 모티브가 되기는 했지만 그의 실제 삶과는 연관성이 떨어지는 픽션으로 소설 '싯다르타'의 싯다르타는 헤르만 헤세가 창조한 인물로 그가 생각하는 삶의 깨달음을 구득(求得) 자(者)에 대한 이야기이다.


실제 부처는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본명을 가지고 BC 6세기 중엽 현재의 인도 북쪽이며 네팔과의 국경 부근인 카필라바스타왕국의 왕자로 태어났다. 29살까지 왕궁에서 속세의 삶을 살았던 그는 당시 브라만교나 힌두교가 신분제의 최고위층인 브라만 계층만이 구도(求道)를 통해 열반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처와 자식까지 버리고 야반도주하여 고행(苦行)으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했으나 별 소득이 없었고 그 후 참선(參禪)을 통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 보리수나무 아래서 명상을 시작하여 49일 만에 깨달음을 얻어 그 후 45년간 신분의 고하, 나이 등 모든 깨달음에 대한 모든 차별적 제도를 부정하며 누구 나의 마음에는 불심(佛心)이 있으며 그것을 깨달음 자만이 속세의 굴레라 할 수 있는 윤회에서 나와 열반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을 설하다 80세에 눈을 감았다고 한다.


하지만 소설 '싯다르타'의 주인공 싯다르타는 출가 후 고행을 하다 부처인 '고타마'를 만난 후 열반의 경지 이른바 깨달음을 얻어 피안으로의 안식을 뜻하는 '바라밀'에 대한 개인의 추상적인 경험의 한계를 인식하고 40이 다 된 중년에 속세의 경험을 하게 되는 점 등이 무척이나 부처의 삶과는 다르며 그 후의 삶도 부처의 삶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뱃사공 조수로서의 삶을 사는 등 완전한 픽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소설 '싯다르타'에서 중요한 것은 작가인 헤르만 헤세가 부처의 삶을 모티브로 해서 창작한 '싯다르타'의 삶을 통해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무엇일까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로 남게 된다.

그 부분에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우선 헤르만 헤세가 이 책을 쓰기 시작한 시점의 그가 처한 상황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 책은 작가 헤르만 헤세가 1904년 출간한 '페터 카멘친트'의 성공으로 직업 작가로 안정적으로 글을 쓰다 1919년 그 유명한 '데미안'이 큰 반향을 일으키며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의 성취를 이룬 시기에 기획되어 쓰기 시작한 작품이다. 그러나 1920년 헤르만 헤세는 글을 집필하기 힘들 정도의 우울증을 앓게 된다. 아마도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있었던 1차 대전을 목도하는 등 개인적 성공과 사회적 몰락을 같이 경험하면서 이제 나이 40에 접어든 작가적 감수성으로 대하는 현실이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그 후 그는 정신분석 치료를 받고 1922년 처음으로 책 집필을 완성하여 발표한 것이 '싯다르타'이다.


살펴보았던 대로 개인적 방황의 시기를 이겨내며 쓴 책이 이 '싯다르타'이다.

그래서 소설 속 '싯다르타'의 나이 40에 남은 것은 세상의 진리를 깨닫고자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보았지만 평온으로 가는 열반행 신작대로가 아니라 피상적인 자아로 돌아오는 되돌이표 같은 생각만 남게 되어 속세의 쾌락에 빠지게 된다. 아마도 당시 헤르만 헤세가 느낀 허무와 일맥상통하기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속세의 물듬을 자각하고 노년의 '싯다르타'는 다시금 수행의 길로 접에 드는데 그것은 중년의 자신을 속세로 데려다준 고령의 뱃사공에게 가서 삶의 깨달음을 구도(求道) 하게 된다.

그 뱃사공의 이름은 바주데바로 그는 강(江)을 통해 삶의 깨달음을 얻은 자이다.


그럼 이쯤에서 나의 이야기가 끝을 향해가는 것을 느끼게 되는데 헤르만 헤세가 이 소설을 통하여 이야기하고 하는 것 그것이 무엇일까는 바로 바주데바와 강을 통해 다시금 얻게 되는 주인공 '싯다르타'의 깨달음 즉, 평온한 마음으로 눈을 감을 수 있는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될 것이다.


책이 불교의 첫 조사(祖師)라 할 수 있는 고타마 싯다르타의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진실된 삶에 이르는 지혜 즉, 그 반야는 무엇일까에 대해 언급해야 할 것이다.

주인공 '싯다르타'는 처음 브라만교의 최고 지위에 있는 바라문 계층에서 태어났다. 신에게 제사를 올리며 깨달음을 구하는 계층의 명석한 아들로 태어난 것이다.

어려서부터 삶의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깨달음에 대한 열망에 가득 차있던 그는 출가하여 고행 수도자인 사문들의 무리에 들어가 고행수행을 하며 깨달음을 얻고자 하였다.

수행과 참선을 통해 자아로부터 멀어지는 법에 대하여 터득하였지만 그것은 잠시만의 도피였지 다시금 자아(自我)로 돌아온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럼 왜 불교에서는 자아로부터 자신을 관조해야 진정한 평온에 이를 수 있다고 한 것인가?

그것은 부처님이 이 세계를 대하는 세계관에 대한 가르침을 이해하여야 한다.

부처님은 세상의 참모습을 공(公)의 개념으로 설명하였다. 이 공이라는 것이 단순히 비워져있다는 뜻이 아니고 세상 만물은 모든 것을 공유하는 입장으로 모든 것은 하나의 일치됨으로 차별 없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모든 물질은 찰라적으로 서로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여 변화할 뿐 그 본질은 하나이기에 세계의 모든 존재들은 공변적(公遍的)으로 존재하는 공의 세계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본질적 세계를 우리 인간은 오온(五蘊)을 통하여 자각하게 되는 현상(現象)으로 인지하게 되는데 이런 왜곡된 세계를 진정한 세상으로 받아들인 다는 것이다.

오온을 통해 받아들여지는 세계 현상 이것은 욕(慾)과 색(色)이 가미되어 눈먼 자아가 빗어낸 허상이라는 것이다. 그 허상의 세계를 깨달아 진정한 가르침으로 열반에 이르는 반야바라밀을 이루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 되는 것이다.


소설 '싯다르타'에서 주인공은 참선과 고행, 고타마의 가르침 등을 통해 열반에 이르는 깨달음의 지혜 즉 반야를 추구했지만 결국 그것은 개인적 경험이 없이는 그것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중생의 무리에 뛰어들었지만 그 역시 실패하고 그 실패의 업(業)으로부터 오는 고통을 통해 자연의 거대한 모습이라 할 수 있는 강(江)의 소리에 귀 기울이다 결국에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사실 책에서도 그 깨달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결국 부처님의 가르침도 개인적 경험의 차이로 인하여 각기 다른 방식으로 깨달음을 얻지 않겠는가? (실제 불교의 가르침에서도 욕계와 속계에서 깨달음을 얻는 수행의 차원을 사선(四禪), 그리고 그 결과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이라 할 수 있는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마지막으로 사선을 통해 세상을 다시금 볼 수 있는 사무색정(四無色定)의 경지 또한 각기 단계를 밝아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따라 다르게 각각의 경지에 단 번에 이를 수도 있고 단계를 모두 밝아 이른다 하지 않았던가.)


미루어 보건대 주인공이 말년에 평온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은 결국 본성(本性)대로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아량과 그로 인해 생긴 자비가 아닐까 싶다.

결국 소설 싯다르타의 주인공이 강(江)으로부터 배운 것은 때로는 평온하게 생명과 안식을 주는 강이 때로는 엄청난 힘을 과시하며 파괴와 죽음을 주는 그 생성과 소멸의 이야기 속에 모든 것들이 공변적으로 존재한다는 불교교리적 세계인식이 말년의 싯다르타가 알게 된 평온에 이르는 지혜가 아닐까 한다.

사실 여기서 부처님의 그 모든 것을 이야기할 능력도 안될뿐더러 설사 이야기하고자 한데도 할 수 없는 것이 나같이 열반에 이르지 못한 중생의 한계이자 세상 이치가 아니겠는가?


다만 헤르만 헤세가 우울증을 겪는 방황의 시절 마음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시련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지혜 그것은 아마도 그대로 놔두어라 하는 'Let it be'의 자세로 세상을 관조할 수 있는 지혜와 결국 모든 것은 하나로 합쳐질 수밖에 없다는 느긋함으로 삶을 대할 수 있는 지혜이 두 가지가 아닐까 한다.

이상 헤르만 헤세의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소설 '싯다르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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