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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가적일상추구 Feb 06. 2022

이상(李箱)- 거울


작가 이상(李箱) 하면 두 가지 이미지가 떠오른다.

우선 그가 그의 대표작 소설인 '날개'의 첫머리에 이야기했듯이 천재라는 이미지이다.

에세이, 시, 소설뿐만 아니라 그림도 잘 그렸던 만능 예술인 이상(李箱) 하지만 그는 이 예술에 대하여 정식으로 공부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그의 사후 10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에도 사랑받고 회자되는 예술가로서의 절대적인 입지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지는 한 가지 이미지는 요절(夭折))이다.

삶이 막 꽃 피기 시작하는 20대 초반 그는 1931년 당시로는 불치병이라던 폐결핵 진단받는다.

피를 토하는 각혈을 하며 삶과 예술에 대한 열정을 불사르는 우리네 그 고달프지만 한 번쯤 꿈꾸어본 그 숭고한 이미지도 아마 그가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두 가지 이미지를 합치고 나니 가난하고 병든 천재적인 예술가라는 요즘 말로 최고의 사기 캐릭터가 완성된다. 우리나라에서 정지용, 백석과 함께 가장 많은 문학 석.박사 논문에 등장했다던 이상(李箱).

많은 문학평론가들은 오늘날 작가 이상(李箱)의 이러한 이미지를 통해 그의 작품을 왜곡하는 것을 경계할 정도로 그야말로 전설 중에 전설로 남은 요절한 천재 작가 이상의 대표 시 거울을 감상해 보기로 하겠다.


거울

    -이상(李箱)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거울속에도 내게 귀가 있소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소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

내악수를받을줄모르는-악수를모르는왼손잡이오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료마는

거울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만이라도했겠소


나는지금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소

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에골몰할게요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요마는

또꽤닮았소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가톨릭 청년》-1934년 10월


문학비평가들은 이 작품을 초현실주의 작품이라고 평한다.

초현실주의 하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의 영향을 받아, 무의식의 세계 내지는 꿈의 세계의 표현을 지향하는 20세기 예술로 특히, 마르셀 뒤샹의 '샘'이나 살바도르 달리의 '기억의 지속'같은 미술작품이 떠오른다.

다분히 기존의 예술계의 정설을 뒤엎는 말 그대로 '아방가르드'적인 예술 말이다.


하지만 초현실주의의 시작은 문학 부분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전쟁터에서 당한 부상으로 고통받던 병사들에게 모르핀을 투약하자 무의식 상태에서 나오는 중얼거림에 신경이 쓰였던 작가들이 그들의 그 말들에 주목하여 인간 내면에 감추어있던 무의식 세계의 발현으로 떠난 여행으로부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의식의 바리케이드 뒤로 철저하게 숨겨져있던 무의식. 이 무의식이 진정한 자아라는 믿음 속에 그 무의식의 세계를 예술적 감각으로 표현하려 했던 초현실주의적 예술운동 영향하에 이 작품'거울'이 있다고 한다.

보성보고 동창으로 평생의 친구였던 구본웅 화백의 '친구의 초상' 작가 이상의 초상화이다

'거울'을 초현실주의적 작품이라는 전제하에 감상을 하고자 한다면 이상(李箱)의 작품답지 않게(?) 의외로 쉽게 다가오는 것이 이 시(詩)이다.

거울을 무의식의 검열과 정제가 깃든 의식이라는 전제를 하면 작가는 작품 내내 거울 속의 자신을 부정하기에 타인들에게 보여지고 의식되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보다는 그 거울 속의 나를 인식하는 진정한 자아를 오롯이 존재하는 자신의 모습으로 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 연부터 거울 속에는 소리가 없는 조용한 세상이라는 표현을 한다.

그렇다! 나(我)의 인식은 늘 나와 언어로 사유를 한다.

잠들어 있거나 보기 드물게 멍 때리지 않는 이상 늘 언어로 자신과 대화하며 시끌벅적한 것이 인간의 인식 체계이다. 하지만 타자와 소통하는 나라는 존재 즉, 페르소나는 사유를 멈춘 고정화된 세계이다.

그렇기에 거울 속의 나는 자신과 끊임없이 대화하는 존재가 아닌 장 폴 사르트르의 말대로 즉자(卽自)존재로 사유가 멈춘 존재이다.


하지만 부조리하게도 그 거울 속에 나도 귀는 있다.

나 자신의 말조차 알아듣지 못하는 귀가 하나도 아니고 두 개가 정상적으로 달려있다.

그 고집불통 거울 속 나에게 손을 내밀어도 같은 방향의 왼손을 내밀어 악수조차 할 줄 모르는 나와는 철저히 단절된 존재이다.


3연에서는 타자에게 인식되는 내 의식의 세계를 통해 나를 인식하는 아이러니를 표현한다.

본디 인간(人間)이란 존재는 본래 타인 속에서 나(我)라는 존재의 독립성을 인정받는 존재가 아니던가?

저 먼 미지의 곳에서 홀로 살아간다면 타자가 인식하는 거울 속 나라는 존재 자체는 성립될 수가 없지 않은가? 


5연은 거울 속 자아보다는 자신의 내면에 잠재된 나만의 욕망을 위해 살 것을 메타포 한다.

그러면서 마지막 6연은 그런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거울 속 자신이 참으로 신경 쓰이지만 자신이 어쩔 도리가 없는 나와는 다른 듯 닮은 자신의 페르소나에 대해 섭섭한 감정을 나타내는 것은 아무래도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타자와 그런 구성원들이 만든 사회에 대한 서운한 감정을 내보이고 있다.

사르트르는 그의 희곡 '닫힌 방'에서 유명한 말을 남겼다.

'타인은 지옥이다' 그렇다. 나의 현실 세계는 내가 인식하는 내가 아닌 타인이 인식하여 만들어 놓은 나라는 즉자적 존재이다.


1934년 자신을 박제된 천재라 칭했던 작가 이상.

그는 거울 속 자신을 보며 타자들이 만들어 놓은 페르소나에 대하여 이런저런 고민을 했지만 자신이 어쩔 수 없는 타자가 인식하는 자신의 모습에 절망한다.

하지만 자신은 그와는 상관없이 지신의 사업에 골몰할 거라는 희망을 노래하지만, 그래도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타자의 자신에 대한 인식을 보며 이내 서운함을 숨기지 못하는 '거울'이라는 시를 감상해 보았다.

이 시를 발표했을 때 시인의 나이가 지금으로 따지면 스물대여섯이다.

작가의 나이를 생각해 보면 어린애 투정 같아 보일 수 있지만 식민지 시절의 암울함과 불치병과 싸우는 불안함을 가지고 사는 그의 처지를 감안해 볼 때 자신의 잣대로 타자를 마음대로 만들어버리는 타자들의 폭력성에 대한 깊은 울림을 느낄 수 있다. 역시 그는 자신의 말대로 천재는 천재인가 보다. 그 시절 이런 생각을 이런 글로 표현하다니 말이다.

1934년 초현실주의적 작품인 이상의 '거울'은 작품 자체만으로 흥미진진하다.

하지만 이 시가 명작(名作)인 것은 지금의 우리들에게도 깊은 경종을 울리는 것이기에 가능하였다는 것을 새삼스레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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