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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가적일상추구 Feb 09. 2022

이상- 날개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 연애까지 유쾌하오.

이상 '날개' 中


박제되어 버린 천재는 현실로부터 완전히 도피한 것인가? 날개가 돋아 다시금 돌아온 것인가?

아무리 읽어보아도 아리송하다.

암울한 현실에 대하여 피하고 또 피하지만 이내 알게 된 그 처절한 실존의 본모습.

1930년대 경성의 자본주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미쓰코시 백화점 옥상에서 그가 다시금 돋아나 날 수 있음을 원했던 것은 과연 세상으로의 돌진이었을까? 아니면 덧없는 현세를 떠나 아득한 내세의 길로 접어듬을 의미했던 것일까? 오늘은 그 물음에 이상 '날개'의 주인공처럼 천천히 혼자만의 연구를 해 보아야겠다.

저 창밖으로 희미하게 비치는 해가 지기 전에 말이다.


여기 1930년대 경성 33번지라고 구획되어 있는 곳에 열여덟 가구가 모여 살고 있는 집 한 채가 있다.

그중 일곱 번째에 사는 26살의 남자는 아내와 단둘이 살고 있는데 그 시절 글을 모르는 문맹이 넘쳐나던 때에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것뿐만 아니라 도스토옙스키나 빅토르 위고의 소설 속에 담긴 철학적. 역사적 의의를 이해하고 있는 정도를 보아하니 어지간히 배운 사람인 듯하다.

하지만 하루 종일 방안에 누워 자신이 행복한지 불행한지조차 분간을 할 수 없으며 그저 빈대가 자신을 물지 않음에 만족하고 설령 물리더라도 피가 날 때까지 끌어대며 묘한 쾌감을 느끼면 그만이다. 

또 아내가 외출한 사이 본래 방 하나를 둘로 나눈 자신의 방에서 아내의 방으로 옮겨 아내의 거울을 보거나 화장품 냄새를 맡거나 돋보기로 휴지를 태우며 소소한 즐거움을 누리는 주인공 도대체 그의 정체는 무엇일까?


답은 그 자신도 잘 모른다는 것이다.

남들보다 많이 배운 것은 확실하지만 돈을 버는 것은 고사하고 아내가 준 용돈조차 쓸 줄 모르는 까막눈 중에 까막눈 아니 암울한 현실에서 도피한 살아있는 박제 그 자체였다.

그리고 자신을 먹여주고 재워주며 용돈도 손에 쥐여주는 아내가 필시 무언가 일을 하긴 하는 것 같은데 주인공은 도무지 아내가 무엇을 해서 자신을 부양하는지 알 수 없다. 아니 알고 인정하면 자신의 삶이 벼랑 끝으로 몰리기에 그 현실에 완전히 눈을 돌린 현실 회피에 이제 저 멀리 달아나고자 하는 도피자 신세가 바로 그였다.

1930년대 조선반도와 만주를 통틀어 가장 큰 백화점이었던 미쓰코시 백화점 경성점

이 남자의 처지를 생각해 보건대 2022년 오늘의 사는 우리들의 모습에 빗대에 봐도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인간 실존의 모습 그대로 인정하기보단 누구의 무엇 또는 무엇으로서의 나 같은 자기 기만적 태도로 삶을 방관하는 부조리한 존재로 부득 부득 이를 갈며 살아가는 우리와 무엇이 다른가?

예전 소설 '김삿갓'광고에 나오던 '백 년도 못 살면서 천년을 논(論) 하는'우(愚), 다시 말해 자신의 실존적 자아를 인정하기 보다 피하는 비겁자의 모습이 우리이다.

소설 속 주인공은 결국 자신의 아내가 무슨 일을 하여 자신을 부양했는지 또 그 일을 위하여 자신에게 어떤 일을 했는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알게 되었을 때 예전에 있었던 날개가 다시금 돋아나 새롭게 날아오르기를 원하며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그것이 실존으로부터의 회피였는지, 아니면 새로운 도약인지는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아마도 박제된 천재 이상 자신이 읽는 사람에 따라 각기 이 소설을 해석하며 자신의 삶을 한 번쯤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자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드는 늦은 오후이다. 

작은 창의 빛이 저무는 즈음 이 짧은 연구를 마쳐야겠다.

이상은 이상(李箱)의 단편소설 '날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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