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성인인 되어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을 하고 그렇게 1970년대 중후반을 보내고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사평역에서'라는 시로 당선이 되었다고 하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1980년 5월에 있었던 일이 이 시에 투영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실제 시를 읽어봐도 그런 느낌이 강하다.
군부(軍部) 독재 시절 산업화라는 명분 아래 참혹히 짓밟힌 우리의 평범한 사람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무엇 하나 제대로 얻은 것 하나 없이 유린당했던 우리네 모습이 깊어가는 겨울날 어디론가 고달픈 길을 떠나기 위해 지친 몸으로 기다리는 모습에 애절함이 묻어나다 못해 눈물이 날 지경이다.
한 번 시를 감상해 보자.
사평역에서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부분 당선작
해방 후 지금까지 우리 민중의 고통은 정치적으론 공산주의에 대항한다는 명분, 경제적으론 낙후된 농업국가를 현대화된 산업국가로 변모한다는 명분하에 일어난 일들이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풍요로운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한다는 키치 아래 실제로 사평역에서 지친 몸으로 어디론가 더 힘들 길로 떠밀려 떠나야 했던 우리네 필부필부(匹夫匹婦)들에게 일어난 일은 아이러니하게도 '풍요로운 자유민주주의 사회'에 반하는 사회에서 일어났던 일들의 재연이었다.
나치의 '선전. 선동주의', 스탈린'대숙청', 모택동의 '문화혁명' 굵은 것들만 예를 든 것이다.
하다못해 일제의 잔재조차 제대로 처리되지 못해 민주화. 노동운동자들에겐 일제강점기 일본 사법부 경찰들이 독립투사들에게 행했던 고문을 배운 대한민국 경찰이 똑같이 모진 고문을 가했다.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이 되고자 정의를 행했던 이들은 불의의 세력들에게 늘 괴롭힘당하는 존재였다.
그 고단함이 묻어 있는 시가 바로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일 것이다.
물론 시에서 표현하는 힘든 민중은 정의를 위해 투쟁했던 민주투사보다 아무것도 모른 채 힘들 길을 하염없이 걸어야 했던 우리 민중 그 자체 일 것이다.
하지만 민주투사이던 노동운동가이던 무산 노동자이던 빈농이던 우리 대다수는 그렇게 애달픈 삶을 살아야만 했다.
곽재구 시인
사실 이 시(詩)는 앞에서 언급한 1980년 5월을 광주 한복판에서 경험한 시인이 그것을 염두에 두고 쓴 시는 아니라고 한다.
이 시는 1979년쯤 써두었다가 이듬해 가을쯤 신춘문예에 응모하여 그다음 해 봄에 당선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1980년 그 일을 겪고 시를 썼다면 이렇게 연민의 눈으로만 우리를 바라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보다는 '사평역에서'는 일제강점기부터 시작해서 1979년까지의 일들 그리고 그 후 일어날 그 수많은 시련을 예견하며 우리 자신을 조금 더 따뜻한 눈으로 바라볼 것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구구절절 배어있는 듯하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신자유주의의 한복판인 대한민국에서 왜 고통받는지도 모른 채 소외되고 있는 현실에서 아직도 '사평역'은 그 고단한 민중들이 졸거나 아픈 몸과 마음에 콜록거리며 목재소에서 버려진 톱밥을 단단히 뭉개 때는 값싼 온기를 뿜는 톱밥난로에 지친 몸을 포개어 쉬며 또 어디론가 고된 길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현실적으로도 우리가 삶의 의미라고 생각하는 그 모든 것들이 자본주의 소비조장사회의 검은 유혹인지도 모른 채 시에 나오는 한 두릅의 굴비와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하루하루 힘겹게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한마디로 1979년의 사평역이 2022년에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땅의 평범한 사람으로 과연 무엇이 우리들에게 진정한 희망이요 살아갈 용기가 되는지 2022년 다시금 되물으며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를 감상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