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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가적일상추구 Aug 22. 2022

최승자 시집- 빈 배처럼 텅 비어

노장사상의 현대시를 감상해 보아요~


1952년 충청남도 연기에서 태어난 최승자 시인은 수도여고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에서 독어독문학을 전공했다. 1979년 '문학과 지성'가을호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하였는데, 1980년대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이성복. 황지우 시인과 함께 이른바 '해체주의 삼인방'이라 불리며 기존 문단의 틀을 깨고 새로운 형식의 시로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누렸었다.


그러던 중 1994년 아이오와 대학 초청으로 미국에 체류하게 되는데 시인의 인터뷰를 보면 당시 시(詩) 창작과 번역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는데 영어원서 번역에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구어체 영어에 대한 아쉬운 마음에 가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곳에서 점성술을 접하고 정작 신비주의에 빠져 1998년 이후 조현병을 앓게 되고 그 후 정신병원에서 2016년 여덟 번째 시집이자 현재까지 발간된 시집 중 마지막인 '빈 배처럼 텅 비어'를 내고 병세가 완화되어 중학교 시절부터 시인의 문학적 재능을 알아보았던 외삼촌의 보살핌을 받으며 경주에 정착하여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노장(老莊) 사상. 명리학. 사상의학과 점성술 등 이른바 신비주의라고 일컫는 사상에 매료되어 조현병에 이르렀다고 한다면 나와 같은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저 천재 시인의 과한 몰입이었다고 할까?

아니면 이성복 시인의 말처럼 진정 문학에 순교를 했다고 표현을 해야 할까?

순교의 의미도 조현병 발병 이후로도 문학창작활동을 하고 있기에 순교라는 표현을 했는지, 아니면 1980년대 철옹성과 같았던 전통적인 여성상에 반하여 여성인권 문학에 투신하였던 점에서 순교라 했는지 개인적으로 명확하게 파악되지는 않지만 시인의 삶이 평범이라는 말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오늘은 앞서 언급했듯이 가장 최근에 펴낸 시집인 2016년 발표작 '빈 배처럼 텅 비어'의 시 몇 편 소개하고자 한다.

특히, 노장사상에 영향을 받은 시(詩)가 다수 수록되어 있는데 한 번 감상해 보자.



빈 배처럼 텅 비어


- 최승자


내 손가락들 사이로

내 의식의 층층들 사이로

세계는 빠져나갔다

그러고도 어언 수천 년


빈 배처럼 텅 비어

나 돌아갑니다


최승자 시집 '빈 배처럼 텅 비어' 中


불교의 공(公)의 세계를 묘사한 것 같기도 하고 노장의 무(無)와 유(有)는 본디 하나로 그저 반복되는 것으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도(道)의 세계를 이야기한 것 같기도 하고 확실히 유물론적이나 유신(有神)론적 세계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시세계(詩世界)임은 분명하다.

또한 수천 년이 지나도 나의 의식은 빈 배처럼 텅 비어 돌아간다는 표현은 다분히 염세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연인 양

- 최승자


우연인 양 그냥 흘러가라

세상은 넓고 깊다

장자를 먹으면 배가 불뚝해지고

노자를 먹으면 배가 도로 허해진다


우연인 양 그냥 가라

하늘은 넓고 깊다

그대는 다만 바다처럼 바다처럼

미소만 지으면 그뿐이다


최승자 시집 '빈 배처럼 텅 비어' 中


장자 대종사 편에 보면 진인(眞人)은 돌고 도는 세상사에 죽음조차도 잠시 주어지는 안식이니 그도 축복해 주어야 마땅한 것으로 이야기가 나온다. 인간의 삶과 죽음은 생(生)과 사(死)의 갈림길이 아니라 그렇게 존재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의 존재방식일 뿐이다.

그로 유추해 보면 수많은 시공(時空) 속에 존재하는 우주의 모든 것들의 서사는 모두 필연이 아닌 우연일 뿐이니 태어났다고 기뻐할 것도 아니며 죽었다고 슬퍼할 것은 더욱 아니며 그저 윤회라는 굴레에서 현상되는 것들을 잘못 인식함에 나타나는 허상에 대한 과한 반응일 뿐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에 초연하여 그저 미소만 지으면 그뿐이라는 시에서는 허무보단 존재의 실재를 파악함으로써 삶을 긍정하는 모습을 기분 좋게 감상할 수 있다.


슬픔을 치렁치렁 달고

- 최승자


슬픔을 치렁치렁 달고

내가 운들 무엇이며

내가 안 운들 무엇이냐

해 가고 달 가고

뜨락 앞마당엔

늙으신 처녀처럼

웃고 있는 코스모스들


최승자 시집 '빈 배처럼 텅 비어' 中


개인적으로 이 시를 읽고 있노라면 왠지 거대 우주 앞에서 우리 개개인들의 슬픈 서사에 대해 굳이 그렇게까지 그것들을 치렁치렁 달고 살 필요가 있겠냐며 미소 짓는 시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우리는 이런 말들을 자주 한다.

세상 모든 근심 걱정 다 가진 사람처럼 굴지 좀 말라는 타박을 자주 듣기도 하며 때론 타인에게 하기도 하며 살아간다. 우주 평행이론. 우주팽창설 등 현대의 우주 이론들을 생각해 보면 늙으신 처녀처럼 웃고 있는 저 코스모스(우주)도 더 큰 우주를 생각하면 아무 존재도 아닐 정도의 크기 일 것이다.

가볍게 생각해도 서로 먹지 못해 안달인 지구를 우리 은하계의 크기에 비유한다면 먼지 한 톨도 크다고 하지 않던가?

우리가 하는 고민에 필연적으로 따라와 무의식 속에 치렁치렁 크리스마스트리 장식품처럼 달리는 슬픔들.

슬픔을 치렁치렁 달고 구질구질하게 살지 말고 어차피 다 없어질 슬픔 살아생전 훌훌 털고 그저 미소 짓자는 최승자 시인의 따뜻한 시를 마지막으로 2016년에 낸 '빈 배처럼 텅 비어'의 시 몇 편을 감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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