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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가적일상추구 Aug 31. 2022

서정주- 자화상, 화사(첫 시집 화사집)

그의 삶은 그의 첫시집에 모든 이야기를 다 해놓았다

1941년 스스로를 머슴의 아들이라 칭하던 가난한 청년 시인 서정주는 돈이 없는 가운데 오장환 시인이 운영하는 남만서고에서 친구이자 후원자인 김상원의 자비 500원을 지원받아 첫 시집을 출간한다.

등단 이후 특히, 1935년에서 1940년까지의 작품 24편이 실렸으며 발행인은 오장환, 표지 글씨는 정지용이 써준 시집의 제목은 화사집(花蛇集)으로 한국 현대 서정시의 전설이 시작되는 기념비적 출간이었다.


서정주의 삶에서 떼어낼 수 없는 치욕이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일제에 부역한 것이요, 또 다른 하나는 군사정권을 찬양하였던 이력이다.

하지만 그도 가난하지만 정의에 불타는 시절이 있었으니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하고 옥고를 치르고 1930년대까지는 특별한 친일적 행위는 없다가 1944년 1월 마쓰이 오장 송가라는 조선인 가미카제 특공대 희생자를 찬양하는 시를 쓴 것으로 친일의 멍에를 쓰고 말았는데 사실 군사정권에 대한 부역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개인적으로 1940년대 서정주의 일제 부역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조금은 든다. (문인활동을 계속하고자 한다면 친일은 피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을 때이므로 나의 예술을 위해 불가피하게 친일을 하였다를 가지고 마냥 흔들기에는 개인 예술 활동에 대한 자유는......)


1942년 일제는 미국과의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자국뿐만 아니라 식민지에도 총동원령을 내리는데 당시 문인들에게는 징용과 징발을 부추기는 글을 기고할 것과 모든 출판물을 일본어로 강요하던 시기이다.

이 시기 민족정신 투철한 문인은 작품 활동을 남몰래 하거나 정지용 시인같이 아예 절필을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어찌 되었든 문인활동을 계속하고자 할 경우에는 친일행위는 피할 수 없었던 때였다.

그렇다 하여도 서정주 시인의 친일 어용일간지 매일신보에 조선인 가미카제 조종사를 찬양하고 일제에 징용과 징병에 적극 동참할 것을 권하는 행위는 반민족적인 용서할 수 없는 과오이다.


어찌 되었 간에 서정주 시인이 우리나라 현대 서정시에 미친 영향은 간과할 수 없으니 그의 시들을 하나하나 감상하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성지순례와도 같은 일이고 친일행위 전 쓰인 서정시들로 이루어진 화사집 자체에 대한 의의와 평가는 절하될 수 없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오늘은 그런 그의 첫 시집 '화사집'의 첫째, 두 번째로 수록된 시이자 그의 대표작인 '자화상'과 '화사'를 감상해 보도록 하겠다. 


자화상

   -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으련다.


찬란히 틔어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서정주- 화사집 中 1941



작가는 자화상이라는 시의 제목에 걸맞게 스물셋 자신의 삶을 뒤돌아 본다.

그러나 자신이 종의 자식이라는 둥, 자신을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라는 둥, 병든 수캐처럼 헐떡거리며 왔다는 둥 하며 자신을 비하한다. 식민지 시절 가난한 우리 삶을 대변하는 상징과도 같을 수 있다.

그 시절 평민으로 호의호식하며 산 이가 있을까?

하물며 종의 자식이라는 작가의 삶은 오죽하였으랴? 남의 집 종이기에 밤이 되어도 집에 오지 않는 아버지, 한 달 내내 풋살구가 먹고 싶다던 어머니, 그런 어머니 옆에 손톱에 때가 잔뜩 끼어 갑오년 동학농민운동에 무참히 희생되었으리라 점쳐지는 그의 외할아버지를 꼭 닮은 그 자신 그렇게 가난한 유년 시절을 보냈고 지금 와 생각하니 자신을 키운 건 팔 할의 바람 즉, 고난이었다.


그런 시대에 태어남에 자신의 과오에 대하여 결코 뉘우치지 않으리라는 다짐 속에 핏방울처럼 쓰여내 지는 시(詩)를 위하여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트린 병든 수캐처럼 여기까지 왔다고 한다.

작가 생각엔 그 수캐가 그 시절 가장 강력한 생명력 지닌 존재였을 것이다.

그런 시인이 팔십오 세를 일기로 죽었을 때 모두들 이야기했다.

스물셋에 쓰인 시처럼 그가 살았노라고 시대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기에 자신은 자신의 과오에 대해 뉘우칠 생각이 없다고 했던 시인. 그 시인은 그렇게 수캐처럼 생명력 있게 자신의 삶을 살아내기는 했지만 그랬던 그의 삶은 죽음 이후에는 빛을 점점 잃어가며 그저 늘어트린 혓바닥을 끌며 사는 수캐에 지나지 않았음을...... 우리는 그렇게 그를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문학적 재능은 너무도 높고 순결하기만 하다.

시대를 잘 못 태어났지만 우리에게 위인이자 전설로 회자되는 시인들과는 반대의 삶을 살았던 시인 서정주.

역설적이게도 그는 그의 첫 시집 첫 시로 그렇게 자신의 삶 모든 이야기를 다 펼쳐내는 기염을 토(?) 해낸 것이었다.


다음은 화사집 두 번째 시인 화사(花蛇) 즉, 꽃뱀을 감상해 보자.


화사(花蛇)

       - 서정주


사향 박하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배암······

을마나 크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라운 몸뚱아리냐


꽃다님 같다

너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내든 달변의 혓바닥이

소리 잃은 채 낼룽그리는 붉은 아가리로

푸른 하늘이다. ······물어뜯어라, 원통히 물어뜯어,


달아나거라, 저놈의 대가리!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사향 방초길

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은

우리 할아버지의 안해가 이브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석유 먹은 듯······ 석유 먹은 듯······ 가쁜 숨결이야.


바눌에 꼬여 두를까부다. 꽃다님보단도 아름다운 빛······

클레오파트라의 피 먹은 양 붉게 타오르는

고운 입술이다······ 스며라, 배암!


우리 순네는 스물 난 색시, 고양이같은 고운

입설······스며라, 배망!

서정주- 화사집 中 1941


지금으로부터 근 100여 년 정확히 따져도 80여 년 전에 이런 시를 쓸 수 있었다니 참으로 아연질색이다.

그 시절 꽃뱀으로부터 받은 영감으로 인간 의식의 이중성을 가지고 선보다 악, 미보다 추를 추구함에도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자화상'에서는 그 젊은 나이에 자신의 삶에 대하여 으름장을 놓듯이 이야기하더니 자신은 고매한 도덕이나 관념 따위는 버리고 인간 무의식의 기저에 있는 탐미적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는 시는 책의 앞부분에 쓴 발문과도 같은 시로 사실 서정주 시인은 '자화상'과 '화사'에 적어 놓은 대로 살았다고 할 것이다.


어찌 되었든 간에 구약의 창세기에서 모티브를 얻어 고대 로마 삼두정치 시절 최대의 스캔들(?) 사건인 클레오파트라까지 들먹이며 자신의 가치관을 표현했다는 점도 관전 포인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화사집의 이 두시로 청년 시인 서정주는 자신의 삶은 이렇게 살 터이니 간섭하지 말라는 선전포고를 한 셈이고 그 후에 이루어진 자신은 자신의 삶에 대해 후회나 반성 따위는 필요 없다는 선언은 이미 예견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람의 삶으로 치자 면야 허물 많은 삶이지만 문인으로서의 삶이라고 한다면야 무한히 위대했던 시인 서정주의 첫 시집 '화사집'의 대표작 '자화상'과 '화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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