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치하에 태어나 조국의 광복은 보지도 못하고 그 일제에 의하여 요절한 시인 윤동주.
1917년 태어나 해방 불과 다섯 달 전인 1945년 2월. 27살의 나이로 먼 이국땅이기도 하지만 그보단 너무나 싫었던 그 나라의 땅인 일본 후쿠오카의 형무소에서 석연치 않은 이유로 짧은 생을 마감한 시인 윤동주.
짧은 생이지만 누구보다 불안과 죄의식에 자신을 붙잡아 매며 순결한 길을 가자고 했던 그.
- 여담이지만 이십대의 학생조차 불의에 물들지 않으려 시를 써가며 떳떳하게 살고자 홀로 분투했건만 이 땅의 친일 매국노들은 눈앞에 부귀영화에 눈이 멀어 같은 조선 사람과 땅을 팔아넘기며 잘 살더니 미 군정 하에서는 반공을 울부짖으며 빨갱이 사냥에 열을 올렸다. 그 노력(?)에 하늘도 감동했는지 현재 이 땅의 기득권은 나라를 위했던 사람들이 아니라 철저하게 개인을 위해 산 사람들이라는 현실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내 나라 없이 태어나 내 나라 없는 현실에 이국땅에서 짧은 생을 마감한 윤동주.
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중 두말할 필요 없이 우리 가슴에 늘 빛나고 있는 위대한 시인 '서시(序詩)'를 적어본다.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中
짧은 시이지만 너무나 강렬하다.
시인 윤동주가 젊기에 이처럼 강렬한 시가 쓰인 것 같다.
사실 윤동주 시인은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미션스쿨을 다닌 모태 기독교인이다.
하지만 불교적 관점에서 봐도 이치에 맞는 보편적인 종교관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 놀라울 뿐이다.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럼이 없는 삶.
이것은 다르마(법-法)에 순응한 삶. 즉 열반을 향한 수행을 하며 우주 만물의 진리를 깨닫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잎새에 바람이 분다.
시인 윤동주는 불안하다. 다르마의 순응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카르마(업-業)는 선(善)이 아니라 악(惡)으로 치닫는 것 같다.
바로 업보(業報)를 쌓는 것 같은 불안감과 죄책감이 밀려온다.
누구든 아니 양심이 있는 사람이면 그 불안의 감정을 떨쳐버릴 수 없다.
-아니 양심이 없는 사람도 불안은 할 것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기에 우리는 태생적으로 불안할 수밖에 없다. 다만 그 불안의 원인과 극복 방법이 너무나 다른 그 점만이 틀릴 것이다.-
그 고백 뒤에 그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시인은 별을 노래하며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며 살겠다고 다짐한다. 기독교적으론 시인이 말하는 사랑 그 자체이지만 불교에서는 연민(憐愍)에 기인한 자비(慈悲)에 해당되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시인은 세상의 고달픔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상기하지만 앞에서 다짐한 순결한 길을 가고자 하는 의지를 다지며 깊은 밤을 덮는다.
나의 삶도 어느덧 사십 대 중반으로 접어 들어간다.
나는 나의 길을 가고 있는가?
오늘도 쌓여만 가는 업보에 부끄러워하며 참회하여야 함에도 눈앞에 모든 고통의 망각과 욕망의 굶주림에 대한 채움을 위해 살고 있지는 않는지,,,,,,,,,
진리를 향한 몸과 마음가짐에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아무 생각이 없음에 부끄러워지는 현실이 그저 개탄스러울 뿐이다.
2022년 09월 03일 새벽녘 안개 자욱하게 내린 길 산책하며 생계와 그 고됨의 망각을 위해 사는 한심한 불혹의 가운데 서있는 나이가 된 나를 되돌아본다.